영어로 학술서 낸 76세 토종교수, 영어비결 묻자 “무소반읽외”

중앙일보

입력 2021.08.23 05:00

업데이트 2021.08.23 10:58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 한국 '토종'이지만 영어로 강의하고 책도 펴냈다. 우상조 기자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 한국 '토종'이지만 영어로 강의하고 책도 펴냈다. 우상조 기자

한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영어로 강의를 하고, 게다가 영어로 학술서적까지 낸 학자가 있다. 1945년, 나라가 해방을 맞던 해에 태어난 구대열(76) 이화여대 명예교수다. 지금처럼 영어 공부법이 다양하던 때가 아니었던 당시, 일반 국민의 해외여행이 흔치 않았던 때 영어로 일가를 이뤘다.

영국 출판사에서 최근 펴낸 그의 묵직한 책 『한국 1905~1945: 일제부터 광복과 독립까지』은 496쪽에 달한다. 그나마 많이 잘라낸 결과다. 영국 명문 런던정경대(LSE)의 첫 한국인 박사학위 취득자이기도 한 그는 유학도 한국일보 기자생활 5년을 한 뒤 늦깎이로 갔다. 지난 18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 본사에서 만난 그에게 대뜸 영어 얘기부터 물었다.

“아직도 R과 L 발음 잘 못하는 걸요.” 허허 웃으며 내놓은 그의 답이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미국 외교의 살아있는 전설인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영어도 들어보면 (그의 태생인) 독일어 억양이 강해요. 그래도 할 말 다하고 농담도 하죠. 혀 굴리는 발음에만 집착을 너무 하는 것 같습니다.”

비결이 뭔지 물었다. 그는 “무조건 소리내서 반복해서 읽고 외웠다”는 무미건조한 답을 내놨다. ‘무소반읽외’ 학습법이다. 책 두 권을 정해놓고 완독할 때마다 바를 정(正)를 써가며 계속 외웠다. 어느새 바를 정 글자가 200개가 넘었다고 한다.

구대열 교수가 낸 책. 영국의 유명 학술서적 전문 출판사인 르네상스 북스에서 펴냈다. 우상조 기자

구대열 교수가 낸 책. 영국의 유명 학술서적 전문 출판사인 르네상스 북스에서 펴냈다. 우상조 기자

충격요법도 있었다. LSE의 박사학위 담당 지도교수님의 강펀치였다. 구 교수는 “논문을 써냈는데 ‘좋아, 흥미로운데 내 방으로 오게나’라고 해서 갔더니 ‘이 영어로는 박사학위는 안 되고 그 아래 학위는 가능하다’고 하시더라”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했다. 구 교수는 포기나 타협 대신 재도전을 택했다. 지도교수에게 “한 달만 더 달라”고 한뒤 논문을 싹 수정했다. 그리고 통과했다. 한국 대학에 영어 강의 열풍이 불었을 때도 제일 먼저 영어로 강의한 한국인 교수였고, 미국 미네소타대학에서 초청받아 1년 한국 문화와 역사를 강의한 적도 있다.

그는 “지금도 영어로 말을 할 일이 있으면 떨린다”며 “그래도 중요한 건 알찬 내용이라는 건 한국어건 영어건 다 똑같다”고 강조했다.
이번 책의 내용은 알참 그 자체다. 책의 토대는 그가 과거에 냈던 『한국 국제관계사 연구』를 토대로 했다. 영ㆍ미 정부문서보관소를 뒤져 발굴한 일제 시대 한반도 관련 외교문서가 주재료다. 조선을 두고 열강이 어떤 외교 전략을 취했는지를 파고들었다. 영문판 서문엔 특히 공을 들였다. 그는 “지난 100년간 나온 학술서적의 서문 중 100편을 뽑는다면 그 안에 들어갈만한 글을 쓰자고 생각했다”며 “(박사 논문을 퇴짜놓았던) 지도교수님께 보냈더니 ‘서문에서 많이 배웠다’고 하시더라”고 말했다.

굳이 왜 일제시기 한반도 국제관계를 주제로 정했을까. 그는 “과거 서류와 문서를 찾아보면 중국이나 영국 외교관들이 ‘조선은 슬슬 달래주다가 때리는 시늉을 하면 말을 듣는 어린아이 같다’고 하는 내용이 많다”며 “수ㆍ당나라를 무찔렀던 강국을 가졌던 한반도가 왜 이렇게 됐을까, 한국인들의 국제정치 행위의 뿌리는 뭘까가 궁금했다”고 설명했다.

구대열 교수가 18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 본사에서 인터뷰하던 중 책을 살펴보고 있다. 우상조 기자

구대열 교수가 18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 본사에서 인터뷰하던 중 책을 살펴보고 있다. 우상조 기자

이 책의 미덕 중 하나는 객관성이다. 조선이 일본에 식민지로 넘어간 이후와 광복까지를 다루면서도 손쉬운 반일감정에 빠지지 않는다. 그는 “소녀상이며 죽창가로 반일감정을 부추기는 건 쉽지만 일본의 진실된 면을 보는 것은 어렵다”며 “일본과의 관계를 가능하면 객관적으로 보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지난 30년 동안 각주 없는 글은 안 썼다”고 덧붙였다. 학자로서의 강한 자존심이 묻어났다.

그의 노력은 국제 학계에서 먼저 알아보고 있다. 책을 읽은 일본의 한 미국인 학자가 그에게 연락을 해오기도 했다. 이 미국인 학자는 구 교수에게 “일본에 대해 객관적으로 글을 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한국인 학자인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구 교수는 “우리는 우리 과거를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며 “우리 문제를 세계사적인 관점과 국제학적 시점으로 정확히 보고 접근해야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정확히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책은 그런 노력의 결정체인 셈이다.

앞으로도 파고들고 싶은 주제는 많다. 그는 “고려시대 외교사도 들여다보고 싶다”며 “그런데 아내가 건강 생각하라며 말린다”고 말했다. 학자인 남편처럼 부인 박원숙 여사 역시 와인 관련 책을 다섯 권이나 펴낸 전문가다. 구 교수는 “30년 넘게 책상에 앉은 모습만 아내에게 보여줘서 미안하다”며 “앞으로는 원숙씨 외조도 더 잘해야지”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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