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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보 가능성에도 언론 자유가 먼저" 이랬던 13년전 조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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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언론 자유 수준 매우 높다. 그러나 언론의 책임 수준 매우 낮다. 언론중재법 개정안은 이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한 것뿐이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지난 21일 페이스북에 이런 내용의 글을 적었다. 지난 19일 국민의힘·정의당 등 야당과 학계·언론계의 반발에도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를 통과한 걸 환영하면서다. 더불어민주당·열린민주당은 그날 수적 우위를 내세워 표결을 통해 법안 통과를 밀어붙였다.

조 전 장관은 22일에도 페이스북에 “대통령, 총리, 장관, 국회의원, 판검사 등은 언론중재법상 피해구제 대상이 아니다. 적용 시기도 대선 이후다. 그런데 어찌 이 법이 권력 비리를 은폐하고 집권연장을 위한 법이 되는가”라며 법안을 감쌌다. 그러나 법조계에선 과거 조 전 장관이 내비친 언론관과 사뭇 다르다는 지적이 나왔다.

조국, 2008년 칼럼엔 “언론 보도는 항상 오보 가능성 내포”

국민의힘 의원들이 지난 19일 오전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회의장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골자로 한 언론중재법 개정안 통과에 반대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위원장석엔 더불어민주당 소속 도종환 국회 문체위원장이 앉아 있다. 임현동 기자

국민의힘 의원들이 지난 19일 오전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회의장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골자로 한 언론중재법 개정안 통과에 반대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위원장석엔 더불어민주당 소속 도종환 국회 문체위원장이 앉아 있다. 임현동 기자

조 전 장관은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1년 5월 전국언론노조 SBS본부 주최 강연에서 “(인터넷 논객)미네르바가 전기통신기본법 위반으로 구속 수사를 당하고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아고라 사용자들은 글을 내리고 자기검열을 시작했다”며 “이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냉각 효과였다”고 말했다.

법원 판결과 무관하게 특정인에 대한 법 집행 행위만으로도 다른 이들의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걸 우려한 것이다. 당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등도 전기통신기본법 해당 조항의 위헌성을 주장하며 “그 내용이 극히 모호하고 수사 기관과 법원의 주관적 판단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민주당 강행한 언론중재법... 막판에 뭐 고쳤나 그래픽 이미지.

민주당 강행한 언론중재법... 막판에 뭐 고쳤나 그래픽 이미지.

조 전 장관은 2009년 8월 한겨레신문 칼럼을 통해서는 보다 명료한 언론관을 밝혔다. 영화배우 김민선씨가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광우병이 득실거리는 소를 뼈째로 수입하다니, 차라리 청산가리를 입안에 털어 넣는 편이 오히려 낫겠다”라고 쓰자, 한 미국산 쇠고기 수입·유통업체가 김씨를 상대로 3억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한 데 대한 논평이었다. 조 전 장관은 “이번 소송은 헌법상의 권리인 표현의 자유를 봉쇄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황당함에 더해 위기감을 느낀다”며 미국 ‘오프라 윈프리 쇼’의 예를 들었다.

“1996년 4월 16일, 오프라 윈프리 쇼에 전직 방목노동자이자 사육장 관리자이며 ‘양심을 갖고 먹읍시다’ 캠페인의 대표인 하워드 라이먼이 출연해 광우병의 위험을 고발했다. 이에 윈프리는 ‘햄버거를 먹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그러자 텍사스육우협회는 그와 그의 프로그램 제작사, 라이먼을 상대로 1100만 달러의 손해배상소송을 청구했다. 결과는 육우협회의 패소였지만, 소송 과정에서 윈프리는 고통과 비용을 감수해야 했다. (중략) 정신적 고통과 경제적 부담을 안겨줘 본때를 보이고, 다음으로 예상되는 많은 비판자들에게 까불지 말라는 경고를 주려는 것이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최근 야당과 언론계, 학계가 반대하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여권이 단독 표결로 국회 상임위를 통과시킨 데 대한 환영에 뜻을 표했다. 사진은 지난 13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 들어서는 조 전 장관에 모습. 뉴스1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최근 야당과 언론계, 학계가 반대하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여권이 단독 표결로 국회 상임위를 통과시킨 데 대한 환영에 뜻을 표했다. 사진은 지난 13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 들어서는 조 전 장관에 모습. 뉴스1

조 전 장관은 이보다 1년 앞선 2008년 8월 같은 신문 칼럼에 “급변하는 사회현실 속에서 언론보도는 항상 오보의 가능성을 내포하며, 정부에 대한 비판은 당연히 담당자에 대한 명예훼손을 초래한다. 그러나 언론 보도로 명예훼손을 당하는 피해자가 공적인 존재이고, 그 보도의 내용이 공적인 관심 사안인 경우에는 언론의 자유가 우위에 서야 한다는 것이 민주국가의 확고한 판례”라고 쓰기도 했다.

조 전 장관은 지난 19일 페이스북에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에 대해 “영미법 국가에서 다 운용하고 있는 제도를 도입하는 것으로, 오랫동안 학자로서 도입을 주장해왔다”라고도 썼다. 하지만 그가 유학했던 미국은 수정헌법 1조에 따라 발언 또는 출판의 자유를 제약하는 어떠한 법률도 두고 있지 않다. 다만, 법원 판례를 통해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을 제한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미국, 언론 ‘실질적 악의’ 엄격히 따져

정의당 배진교 원내대표, 이은주 원내수석부대표, 장혜영 의원과 윤창현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 김동훈 한국기자협회 회장, 방송기자연합회, 한국PD연합회 소속 회원들이 지난 1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하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에 대해 강행 처리를 중단하고 사회적 합의 절차에 나설 것을 촉구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정의당 배진교 원내대표, 이은주 원내수석부대표, 장혜영 의원과 윤창현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 김동훈 한국기자협회 회장, 방송기자연합회, 한국PD연합회 소속 회원들이 지난 1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하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에 대해 강행 처리를 중단하고 사회적 합의 절차에 나설 것을 촉구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실제 미국에는 언론에 대해 거액의 징벌적 손해배상을 인정한 판례가 여럿 있지만, 징벌적 손해배상의 요건이 되는 언론의 ‘실질적 악의’를 까다롭게 따지는 편이라는 게 법조계의 중론이다. 미 연방대법원은 1988년 “공적 인물은 언론보도 등 명예훼손적 표현이 실질적 악의를 갖고서 공표됐음을 증명하지 않으면 터무니없고 추잡한, 고의적인 풍자로 입은 정신적 고통에 대해 손해배상을 받을 수 없다”고 판시하기도 했다.

오히려 미국 내 29개 주(州·2019년 현재)는 표현의 자유 위축·냉각 효과를 기대하며 소송부터 거는 ‘전략적 봉쇄소송’(SLAPP·Strategic Lawsuit Against Public Participation)에 대한 통제 장치를 함께 갖추고 있다. 표현의 자유 침해 목적 등의 SLAPP인 경우 법원이 조기에 소송을 각하하도록 하는 이른바 ‘SLAPP 억제법’(Anti-SLAPP Law)이다.

한국에서도 금태섭 전 민주당 의원이 2018년 “전략적 봉쇄소송은 표현의 자유나 청원권 등 민주적 정치과정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기본적 권리들을 크게 위축시키는 것은 물론 소송 결과와 상관없이 경제적·심정적으로 큰 부담을 주고, 정치적·공적인 사안을 경제적 권리나 개인 평판 문제로 변형시키는 문제가 있다”며 같은 취지의 민사소송법 개정안을 발의한 적이 있지만 20대 국회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다만, 현직 변호사인 금 전 의원은 이날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미국과 달리)언론에 대한 형사처벌 제도(명예훼손)를 두고 있는 것만으로도 한국의 언론환경은 많이 위축된 상태”라며 “한국의 사법 관행상 논리적으로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하나하나 따지는 경우가 많아 SLAPP 억제법을 같이 도입한다고 해서 언론을 제약하는 현실을 막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언론중재법이란

언론중재법 개정안은 ▶언론 등의 명백한 고의 또는 중과실로 인한 허위·조작보도의 경우 법원이 손해액의 최대 5배에 이르는 징벌적 손해배상을 명할 수 있도록 하고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를 입힌 허위·조작보도, 보복적·반복적 허위·조작보도, 정정보도·추후보도가 있는 기사에 대해 검증절차 없이 복제·인용한 보도, 기사의 본질적인 내용과 다르게 제목·시각자료를 조합한 보도를 ‘명백한 고의 또는 중과실’로 추정한다는 게 골자다. 언론계에서는 이 법안에 대해 “징벌적 손해배상의 근거가 되는 허위·조작 보도는 그 개념이 불분명하고 자의적으로 해석돼 언론을 손쉽게 통제할 수 있는 길을 터놓고 있다”(국내 언론 7단체)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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