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영원한 증언자' 위안부 할머니들 되살린 할리우드 출신 교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991년 고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를 처음으로 증언한 지 30년. 정부에 등록된 238명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중 생존자는 이제 14명이다. “증언은 내 생명이다”(이용수 할머니)라고 말하는 할머니들. 그러나, 무심한 세월 속에 생명과 증언은 모두 힘을 잃어가고 있다.

서울 마포구 서강대학교에 시범 전시 중인 '영원한 증언' 프로젝트. 영상 속 이용수 할머니가 증언을 하고 있다. 석경민 기자

서울 마포구 서강대학교에 시범 전시 중인 '영원한 증언' 프로젝트. 영상 속 이용수 할머니가 증언을 하고 있다. 석경민 기자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할머니들과 생생한 가상 대화를 나누는 ‘영원한 증언’ 프로젝트는 그런 고민에서 출발했다. 김주섭 서강대 지식융합미디어학부 교수가 나섰다. 유명 할리우드 영화의 특수 효과 제작에 참여했던 김 교수는 이옥선·이용수 할머니의 증언에 ‘영원한 생명’을 불어 넣었다. 그는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반복되질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됐다”며 프로젝트의 취지를 설명했다.

“여기서 영원히 증언할게”

‘영원한 증언’ 프로젝트는 약 1000개의 할머니 대답 영상을 촬영하고 여기에 대화형 인공지능 기술을 더한 것이 핵심이다. 서강대 ‘영원한 증언팀’이 여성가족부 산하 일본군 위안부 문제연구소와 함께 개발했고, 대학과 대구 희움 역사관 두 군데서 시범 전시 중이다.

서울 마포구 서강대학교에 시범 전시 중인 '영원한 증언' 프로젝트. 영상 속 이옥선 할머니가 증언을 하고 있다. 석경민 기자

서울 마포구 서강대학교에 시범 전시 중인 '영원한 증언' 프로젝트. 영상 속 이옥선 할머니가 증언을 하고 있다. 석경민 기자

지난 18일 서울 마포구 서강대에 전시된 프로젝트를 통해 화면 속 할머니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일본에 어떻게 사과를 받고 싶은가요”라고 묻는 기자에게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말해야지”라고 이옥선 할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용수 할머니는 “죄를 알아야 하지요. 죄를 모르고 억지로 거짓말만 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고 했다.

수없이 많이 했던 증언이지만, 할머니들은 여전히 증언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용수 할머니는 “이 이야기를 하면 피가 끓는다. 가슴이 무너진다”며 “그때가 되살아나서 마음이 괴롭다. 지금도 하는 건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증언은 참 중요하다. 내 생명과 같다”며 “여기 남아서 영원히 증언하고 있을게”라고도 했다. 이옥선 할머니 역시 “내 죽기 전까지 증언할 것”이라며 “(다음 세대 사람들에게) 일본에 사죄받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다”며 답했다.

“홀로코스트 증언 프로젝트 보고 영감”

김 교수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영화스튜디오에서 특수효과를 만드는 데 필요한 소프트웨어 등을 개발하던 엔지니어였다. ‘라이프 오브 파이’ ‘박물관이 살아있다’ 등 많은 유명 영화가 그의 손길을 거쳤다.

서강대학교 지식융합미디어학부의 김주섭 교수.

서강대학교 지식융합미디어학부의 김주섭 교수.

“사진과 영상을 넘어선 그다음 미디어에 대해 연구하고 싶어서” 2012년 대학교수가 됐고 2018년부터 ‘영원한 증언’ 프로젝트 개발에 들어갔다고 한다. 미국 쇼아 재단(Shoah)에서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증언을 생생히 남기기 위해 제작한 NDT(New Dimensions in Testimony) 프로젝트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증언 장면 녹화를 위해 할머니들과 3~4일을 촬영했다. 김 교수는 “이용수 할머니가 4일간의 촬영을 마치신 후 ‘모든 것을 다 말하니 속이 너무 후련하고 이제 여한이 없다’고 하신 게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증언이 나온 지 30년이 지났지만, 할머니들이 이렇게 장시간 증언하신 적이 없었다고 한다. 할머니들에게 속 시원하게 말할 기회를 준 거 같아 개인적으로 보람이 있었다”고 했다.

김 교수는 “머리로만 알고 있던 비극적인 사건을 할머니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가슴으로 느끼게 됐다”며 “관람객이 할머니들을 만난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할머니들을 기억해 줬으면 한다. 많은 사람이 할머니의 이야기를 기억한다면 사회는 조금이라도 변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본 전시 앞두고 악의적 질문에도 대비

김 교수는 “할머니들의 증언 영상은 100% 녹화 영상이다. 할머니들의 증언이 왜곡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기술은 원활한 음성 대화를 위해서만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AI의 허점을 노린 악의적인 질문에 대한 대비 상황도 시범 전시 기간 마련할 계획이다. 실제가 아닌 AI 기술을 접목한 대화 콘텐트지만, 증언 영상이 악의적으로 이용될 여지를 막기 위해서다. 김 교수는 “(위안부 피해자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은 그룹도 비공개적으로 접촉해 설문지를 통해 다른 시각의 질문을 받을 계획이다. 이 질문들이 나올 경우 영상 속 할머니들이 대답을 피할 수 있게 보완할 생각이다”고 답했다.

영원한 증언 프로젝트는 오는 11월까지 시범 전시를 마친 뒤 대화 과정에서의 오류 등을 수정하고 미국과 한국 등에 본 전시를 할 예정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