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훈범칼럼

양치기 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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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 정부 하는 짓이 참으로 징하다. 그걸 보노라면 떠오르는 고사가 있다. 언짢은 결말이라 떨치려도 잔영처럼 남는다. 기원전 781년 즉위한 서주(西周)의 마지막 임금, 유왕(幽王)의 이야기다.

그에게 포사라는 애첩이 있었다. 절세미인이었지만 도통 웃지를 않았다. 유왕은 만금을 걸고 총희를 웃길 방안을 찾았다. 괵석보란 아첨꾼이 묘책을 내놓았다. 솔깃한 왕은 여산에 올라 봉화에 불을 붙였다. 20여 곳의 봉화대에 차례로 불길이 솟았다. 위급을 알리는 신호 아닌가. 제후들이 군사를 이끌고 천자를 구하려 달려왔다. 사정을 안 제후들이 황당해하는 걸 보고 포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왕은 포사를 웃기려고 그 짓을 반복했다. 기원전 771년 신(申)나라가 수도인 호경을 공격해 왔다. 봉화가 올랐으나 제후들은 오지 않았다. 유왕은 잡혀 죽었고 서주는 망했다. 여산봉화(驪山烽火)의 고사다.

그리스의 이솝이 '양치기 소년과 늑대' 우화를 지은 것은 200년쯤 뒤의 일이다. 순서야 어쨌든 동서양 이야기가 비슷한 것은 인간사에 흔한 일인 까닭이겠지만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그저 웃고 넘어갈 수 없어 안타깝다.

이 정부는 출범 때부터 집값만큼은 반드시 잡겠다고 큰소리쳐 왔지만 지금 그 말을 믿는 국민이 한 명이라도 있는지 궁금하다. 처음엔 믿는 사람도 있었다. 세금폭탄이라는 협박에 "이제 부동산은 끝났다"고 집을 판 사람들은 지금 땅을 치고 있다. 몇 년 새 집값이 '따블' '따따블'이 됐으니 말이다. 이 정부 들어서처럼 집값이 단기간에 폭등한 예가 또 있는지 찾기 어렵다. 부랴부랴 공급 쪽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이미 양치기 소년이 된 정부를 믿는 사람은 없었다. '친절한 병직씨'가 "지금 사면 손해니 나중에 사라"고까지 조언했지만 말 끝나기 무섭게 1억원 넘게 뛰어오른 아파트도 생겨났다. 무제한 신도시 개발과 신도시 분양가 인하 방안 발표에도 시장은 정부의 말과 반대로만 움직이고 있다. 현재 상황이 이상급등이 분명한 만큼 언젠가 폭락 사태가 우려되는데 그때의 혼란을 어찌 수습할까 두렵다.

생각이 북핵으로 이어지면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다. 북한이 핵을 가지고 허풍 떠는 양치기 소년이라더니 정작 거짓말은 우리 정부가 하고 있었다. 동맹국들이 북한의 핵 개발을 경고해도 문제없다 하고 미사일을 쏴도 인공위성이라 우기더니 핵실험을 하고 나니 "핵 개발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균형은 깨지지 않았다"고 했다. 다른 쪽에서는 한.미 동맹을 뿌리째 흔들면서 말이다. 이처럼 국가 안보와 국민 생명을 앞에 두고 장난처럼 말을 바꾸는 정부를 누가 믿겠는가.

하지만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가 늘 비극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페르시아 아바스왕의 재무대신이었던 알리 베이는 어린 시절 양치기였다.

그는 정직하게 나라 살림을 돌봐 왕의 신임을 얻었다. 아바스왕이 세상을 떠나고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알리 베이를 시기하던 신하들이 그를 모함했다. 왕은 그를 파면하고 집을 수색했다.

고위 관료의 집치고 초라하기 짝이 없던 그의 집에는 가죽상자가 하나 있었다. 그 속에 보물을 숨겼다고 믿은 왕은 상자를 열라고 명령했다. 그 안에는 양치기의 지팡이와 피리, 누더기 옷이 들어 있었다. 대신이 된 뒤에도 초심을 잊지 않기 위해 보관한 것이었다. 왕은 자신의 경솔함을 뉘우치고 그를 재무대신으로 복직시켰다.

이 정부가 처음부터 나라를 거덜내기로 작정하지는 않았을 터다. 잘해 보려 했지만 힘에 부쳤을 것이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도 느꼈을 것이다. 그럴 때일수록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잘못과 실수를 인정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걸 덮으려 할수록 더 꼬이는 것이다.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야 한다. 오기와 고집을 버리고 다른 의견을 들어야 한다. 남은 시간은 충분하다.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야 한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