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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한 아파트서 생필품 사재기 소동|「대홍수」현장을 보고…취재기자 방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경기도 고양 군 일대를 물바다로 만든 한강 둑 복구공사도 이제 마무리작업이 한창이고 서울의 마지막 침수지역이었던 풍납·성내동의 물도 14일 오후 모두 빠져나가「65년만의 대홍수」는 본격적인 복구단계에 들어섰습니다.
아직도 일부가 물에 잠긴 고양 군을 비롯, 이번 홍수의 피해는 너무 큽니다. 이재민들에 대한 구호와 복구작업만이라도 빈틈없이 진행되어야 할 텐 데요.
-이제 문제는 빠른 피해복구인데 올해도 까다로운 절차 때문에 예산집행이 늦어지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정부는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여유 돈을 우선 지급한 뒤 나중에 재해대책 비와 계산하도록 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고 있습니다.
건설부도 군수의 복구주택확인서만 있으면 곧바로 주택은행에서 최고 6백58만원까지 복구자금을 융자해 주기로 했습니다.
-구호물자 지원과정에 적지 않은 문제점이 있더군요.
곳곳에서 구호 품 부족사태가 난 것은 고사하고 물량을 충분히 확보해 놓고도 배급과정의 허점 때문에 말썽이 난 곳이 많았어요.
풍납동 주민 2천여 명이 12일부터 14일까지 수용돼 있던 토성국교의 경우 대부분의 수재민이 모포 한 장 지급 받지 못해 13일 오후 8시∼다음날 오전2시까지 관할 동사무소와 구청 측에 격렬히 항의하는 소동이 있었어요.

<영세민 피해 커>
-또 양수기가 부족해 미처 차례가 돌아오지 못한 주민들이 구청직원들의 멱살을 잡고 욕설을 퍼붓는 등 험악한 분위기까지 연출하기도 했어요.
한 주민은 50평 지하실의 물을 퍼내는데 양수기를 지원 받지 못하자 경운기를 불러와 평당5천 원씩 25만원을 주고 물을 퍼내야 했습니다.
-가장 피해가 큰 곳은 역시 고양이지요. 고양 군 침수지역의 경우 14일 오전부터 물이 빠져나가면서 피해지역의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했어요. 진흙범벅이 된 도로 가에는 몰살된 소·돼지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고 폭격을 당한 듯 지붕과 담들이 모두 부서져 버린 가옥들에다 아직 물이 빠져나가지 않은 곳에선 각종 오물과 쓰레기·취사도구 등 이 뒤섞여 둥둥 떠다니는 등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어요.
-신평리에 사는 김정환씨(53·농업)는 지난해 계돈을 타 산 젖소 4마리가 자기 집 마당에 시체로 떠 있는 것을 보고 그만 실신하는 소동도 벌어졌어요.
-상습 침수지역인 광명시 철산1, 2동의 수재민들은 이번 침수피해를 가난의 탓으로 자학하면서 허탈해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가장 피해가 컸던 안양천 둑 밑의 판자촌에서 10년째 산다는 한 아주머니는 84, 87년에도 집이 물에 잠기는 피해를 보았지만 떠날 능력이 없어 그대로 눌러 살다 보니 또 이런 일을 당한다며 한숨을 쉬더군요.
-이번 수해를 보면서 없는 사람들에게 더 큰 고통이 닥치는 것 같아 씁쓸했어요.
전세 값 폭등으로 지하전세방에 내려앉은 사람들이 가장 큰 피해를 보았고 비닐하우스 촌이나 일산지역주민들도 모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해를 입었어요.
그런데도 멀쩡한 강남아파트촌 주부들이 생필품 사재기소동을 벌인 것이나 피해가 속출하던 12일 밤 강남의 일부 룸살롱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온 것은 아무리 사회의 다양성을 인정한다 해도 곱게 봐줄 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같은 분위기 때문에 고양군 일대의 수재민들 사이에는『서울시민을 살리기 위해 한강 둑을 고의로 터뜨렸다』는 악성유언비어까지 나돌더군요.
그런데 수 방 전문가들은 서울 쪽 한강제방과 이번에 유실된 하류 쪽 둑은 체격 좋은 어른과 허약한 어린이에 비유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서울 쪽은 긴급 복구해 사고를 막을 수 있었지만, 일산 제는 손도 못쓰고 당한 것이지요.

<영등포는 뜻밖>
-이번 대홍수는 우선 정확한 기상예보, 기상대·수자원공사·한전 등의 긴밀한 협조체제아래 이뤄지는 합리적인 다목적 댐 수위조절, 지방자치단체의 충분한 사전 수방 대책 등 수 방의 기본이 다시 한번 강조된 좋은 교훈이라고 하겠습니다.
-84년에 수해를 당하고서도 당국이 수방 대책이라고 마련한 것이 유명무실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서울 송 정동의 경우 85년 도에 세운 유수 배제펌프장의 용량이 너무 작아 쏟아져 내리는 빗물을 모두 퍼내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특히 상습침수지역으로 분류되지도 않았던 영등포 로터리일대의 물난리는 전혀 예상 밖이었습니다.
서울시의 조사결과 영등포 유수 배제펌프장의 배수관이 닫혀 있지 않아 이를 통해 수위가 높아진 한강 물이 역류해 들어온 것으로 밝혀져 관리 소 홀에 따른 대표적 인재로 꼽힙니다.

<훈훈한 정 넘쳐>
-재해대책본부의 상황파악이 늦은 것도 문제였어요. 수해상황이 집계되는 고양군청 상황실은 「재해대책본부」라는 간판이 무색할 정도로 수해집계 및 상황 파악이 늦고 담당자들마다 수치가 달라 이틀째부터는「무 대책본부」라는 악평을 듣기까지 했습니다.
-도시지역개발에 따른 후유증·지질점검·수목선택 등 전반적인 부문에 대해 충분하고 세밀한 검토와 대비가 사고예방의 첩경이란 단순한 논리가 이번 인천시 송림 동 참사현장에서도 증명됐습니다.
천재냐 인재냐를 둘러싸고 당국과 피해주민들 사이의 논란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주민들은 벌써 인재임을 전제로 한「보상」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고 인고 당국도 이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설득위주로 나가고 있지만「구호」나「피해자금 융자」라는 용어를 써 천재라는 의미를 은연중에 깔고 있어요.
마지막에는 법정에서 시비가 가려질 가능성이 높지만「고통은 나누면 반」이란 속담을 염두에 두고 천재와 인재를 둘러싸 시비가 서로의 가슴에 또 다른 상처를 주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수마가 휩쓴 곳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도 많았지만 훈훈한 인정이 넘쳐 수재민들의 아리고 쓰린 가슴을 달랬습니다.
자신의 집을 수재민의 임시거처로 제공하는가 하면 거리를 따지지 않고 끼니마다 따뜻한 밥과 국을 장만해 대피소로 나르는 주부들의 온정이 줄을 이었습니다.
-11일 폭우로 사근동 일대 침수지역 사람들이 한양여자전문대로 대피하자 인근 한양국교 학생들은 점심을 거른 채 점심 배 식용 쌀 2천4백kg을 모두 6백여 명의 이재민에게 나누어줘 훈훈한 인정을 느끼게 했습니다. <정리=이철호·김남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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