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맞춤 교육' 아일랜드 르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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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더블린공과대학(DIT)의 엉기어 스트리트 캠퍼스 내부 모습. DIT는 매년 교수·교직원들이 학생들을 면담해 진로 상담을 해주는 '오픈 데이'를 연다. 올해 오픈 데이는 12월 2일에 열린다.

더블린엔 지하철이 없다.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가 넘는 정보기술(IT) 강국 아일랜드의 수도지만 시원하게 내달리는 지하철을 볼 수 없다. 초현대식의 웅장한 건물도, 호화로운 쇼핑몰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지만 거리는 활력이 넘친다.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는 물론 중국.태국.파키스탄 등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넘쳐난다.

인구 증가는 집값 폭등을 가져왔다. 최근 몇 년 새 집값이 2~3배, 시내 중심부는 3~4배나 올랐을 정도다. 집을 사두지 않고 무작정 해외근무를 떠났던 사람들은 너무 올라버린 집값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연장근무를 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래도 아일랜드는 부와 기회의 도시다. 거기에 사람이 몰리는 이유는 '교육'과 '일자리'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교육 인프라는 세계의 칭송을 받는 아일랜드의 자랑거리다. 특히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를 길러내는 맞춤형 교육으로 유명하다.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산업, 과학기술의 발전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선 대학도 같은 속도로 변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 "박사 학위보다 현장 경력이 중요"=아일랜드에서 교수 채용엔 박사 학위보다 기업에서 일한 경력을 중요시한다. 더블린 시내 더블린공과대(DIT)의 로비 번스(경영학) 교수. 그는 8년간 컴퓨터 비즈니스 계통 회사인 제퍼슨 스머핏 그룹에서 선임 프로그래머와 소프트웨어 전문가로 일하다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번스 교수는 "해당 학과와 관련된 분야의 중견 기업인이 교수 선발 때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는 게 일반적"이라며 "그 분야에서 어떤 실적을 올렸는지가 교수 채용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DIT에는 세계 유수의 다국적기업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는 교수가 많이 있다"고 덧붙였다.

그에게 '대학 교수보다 잘나가는 기업에서 높은 연봉을 받으며 생활하고 싶지 않으냐'고 물었다. 번스 교수는 "대학이라고 해서 기업과 비교해 대우가 결코 낮지 않다. 배운 경험을 학생들에게 전수함으로써 사회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대학을 선택했다"고 했다.

학생들에겐 실습과 취업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대학 3학년이 되면 1년 동안 캠퍼스를 떠나 기업에 나가 실무를 익힌다. 학과마다 인턴십을 전문으로 다루는 조교가 배치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졸업생의 98%는 졸업 3개월 이내에 취업이 이뤄진다. 3학년이나 4학년 재학 중 취직되는 경우도 적잖다.

◆ 인큐베이터 센터에 사활 건다=아일랜드 대학에는 '캠퍼스 비즈니스 인큐베이터 센터' 설립 붐이 한창이다. 대학 내 창업 보육 센터다. 여기선 '제2의 구글'을 꿈꾸며 토종기업을 글로벌화하는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더블린대(UCD)의 경우 2003년 1억3500만 유로를 투자해 'NOVA UCD'라는 창업보육센터를 설립했다. 이곳을 기지로 기업화에 성공한 경우가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1999년 컴퓨터 공학부 교수들이 설립한 체인징 월드(Changing Worlds)는 휴대전화의 화면 구성 기술을 보유한 벤처회사로 성공사례가 됐다. 세계 10여 곳에 사무실을 두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SK텔레콤과도 판매계약을 맺고 있다. 현재 25개의 벤처사가 입주해 있는 NOVA는 지난해에만 200만 유로의 로열티를 벌어들였다.

◆ 기업 맞춤형 교육으로 구조조정한 대학들=UCD는 19세기 중반에 세워진 종합대학이다. 인문학 전통이 뿌리 깊은 이 대학이 최근 2년여에 걸쳐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이론(순수학문)에만 능통해서는 취업 시장에서 원하는 일자리를 얻지 못한다"는 실용적 사고가 학교를 움직였다. 구조조정 끝에 11개 단과대학, 110개 학과 체제를 5개 단과대학, 35개 학과 체제로 바꿨다. 과거 따로 떨어져 있던 의학.농학.수의학.보건학 등이 하나의 생명과학(Life Science) 대학으로 통폐합됐다. 3개 대학으로 흩어져 있던 수학.엔지니어링.물리학과도 하나의 울타리로 합쳐졌다.

마리 로러(국제업무 담당) 부장은 "기초 학문에 응용을 접목하거나 인접 학문을 같이 공부함으로써 시너지를 높이고 새로운 시장 수요에 맞추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UCD는 '수평선 프로그램'이란 제도도 운영한다. 신입생이 첫 1년간을 전공과 상관없이 학과 과목을 수강하더라도 학점을 이수한 것으로 인정해 주는 제도다. "학생들로 하여금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한 뒤 자기에게 적합한 전공을 선택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에서 2005년 처음 도입했는데 학생들의 반응이 좋아 확대할 계획"이라는 게 대학 측의 설명이다.

아일랜드가 최근 과학기술.컴퓨터.생명과학 분야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는 것은 대학이 이처럼 기업이 요구하는 '맞춤형 교육'을 실시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물론 대학.기업이 삼위일체가 돼 ▶학과의 신.증설 ▶커리큘럼 조정 ▶교수 초빙 등 교육행정에 긴밀하게 협조하고 있다.

더블린=이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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