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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득의남편생활백서] 나쁜 남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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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면

"아, 오늘 정말 열 받아." 집에 들어서자마자 아내가 씩씩거린다. "왜?"

"주차한 차를 빼려는데 통로에 택배 아저씨가 차를 세워두고 작업하고 있더라고. 나갈 수 없으니 차 좀 빼달라고 했지." "좀 기다리지?"

"기다렸다 그런 거지. 근데 들은 척도 안 하는 거야. 여자라고 깔보고."

"설마? 바빴나 보지."

"나도 바빠. 저녁도 못 먹고 분 단위 시간에 쫓겨 뛰어다니는 학습지 교사인 거 당신 몰라? 차에서 내려 한 번 더 부탁했어. 좀 빼달라고. 그제야 쓱 보더니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다며 담배를 꺼내 피우는 거야. 나쁜 아저씨지?" "뺐어?"

"아니, 억지로 빼다가 결국 살짝 닿았어." "택배차랑?"

"응. 그때 다른 차가 또 주차하려고 들어왔거든. 그제야 담배를 끄더니 비켜주는 거야. 차를 빼서 나가려는데 그 택배 아저씨가 나더러 이러는 거야. 남 차를 박았으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지. 여자가 뻔뻔하게 말도 안 하고 그냥 도망가느냐는 거야. 내가 열 받겠어? 안 받겠어?" "참아야지."

"내려서 보니까 살짝 점 찍힌 거야. 아니, 누굴 뺑소니로 모느냐? 아저씨에게 내가 좀 비켜 달라고 몇 번 부탁을 드렸느냐? 그래도 들은 체도 안 하고 그냥 나가면 된다고 한 사람이 누구냐? 지금 여자라고 얕잡아 보는 거냐? 그 아저씨 오히려 자기가 더 화를 내는 거야. 남 차를 박아 놓고 이 여자가 어디서 행패냐고. 내가 그랬어. 아저씨, 지금 이러시는 거 경상도 말로 '곤조' 부리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저씨 눈을 막 부라리면서 고래고래 소릴 질러.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 한다면서 경찰을 부르든지 해야지 원, 하는 거야. 경찰 이야기만 안 나왔어도 그쯤에서 참고 조용히 가려고 했어." "그래도 참지?"

"참긴. 경찰? 아저씨, 지금 경찰이라 그러셨어요? 그래요. 경찰 좋아하시나 본데 경찰 부릅시다. 경찰 불러요. 내가 차에서 휴대전화 가져와서 그 아저씨에게 들이밀었어. 아저씨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슬슬 꽁무니를 빼는 거야. 오늘 미친 개에게 물렸다느니, 똥 밟았다느니 하면서 말야." "원래 택배 하는 분들이 바쁘시잖아."

"아저씨 아까까진 얼마나 기세가 등등했는데. 진짜 똥 밟은 건 나라니까. 근데 당신 남편이야 남 편이야? 내가 그 아저씨 차 번호 다 적어 왔어. 내일 택배회사에 전화할 거야." "뭐 그럴 것까지야. 아저씨도 다 먹고살자고 하시는 일인데."

"그 아저씨 한 사람 때문에 전체 택배 아저씨들이 욕 먹잖아. 그러니 전화 해서 그 아저씬 택배 못 하게 해야 해. 여자라고 깔보고 함부로 하는 나쁜 남자들 내가 본때를 보여줄 거야." "그래도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뭐가 그러지 않는 게 좋아. 할 거야. 내가 꼭 할 거야!"

말은 이렇게 해도 아내는 전화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잘 안다. 지금 아내에게 필요한 말은 남편이 건네는 따뜻한 위로다. 아까부터 재채기처럼 목구멍을 간질간질하던 말을 나는 비로소 내뱉는다.

"그 '곤조'라는 말, 경상도 말이 아니라 일본말인데…."

아내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나를 바라본다.

"당신이 더 나쁜 사람이야."

김상득 듀오 광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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