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사과 한 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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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사과 한 알'- 홍영철(1955~ )

책상 위의 사과 한 알

어디에서 왔을까?

이 잘 익은 사과 한 알은.

사과는 익어서도 말이 없다.

참 많은 먼지들을 밟으며 걸어온 가을 아침

그러나 가을의 얼굴은 깨끗하다.

모든 잠에서 일제히 떨어져나온 꿈들이

싱그러운 공중을 날고 있을 때,

책상 위의 사과 한 알

누가 이 잘 익는 사과 한 알을 말하랴.

누가 오늘밤을 말하며

누가 저것들의 겨울을 말하랴


빨간 홍옥 하나 흰 접시에 놓고 보면 처음엔 예쁘다가 좀 지나면 시디시다가 또 좀 지나면 신기하고 신비하다가 또 좀 지나면 질문이 오지요. 어디서 왔을꼬. 이 빛 이 모양 이 꿈 이 생명. 사과가 걸어온 길 따라가면 하나님도 부처님도 다 있을 것. 칼을 들고 하나님을, 부처님을 깎아서 아삭아삭 먹지요. 가만! 조금만 바라본 다음 칼을 듭시다!

<장석남.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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