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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허균 시맥의 뿌리 명주 애일당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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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백두는 큰 줄기를 동으로 뻗어 금강과 설악을 앉히고 동해에 등뼈를 세워 내리러니 경포에 못 이르러 교산 한 채를 빚는다. 이 작은 산이 세상에 널리 이름을 내게 된 것은 교산 허균이 그 호로 빌려쓴 것에서 비롯한다.
교산은 허균의 또 다른 이름이 될 만큼 생래적인 인연이 있었을 뿐 아니라 그의 전 생애에 숙명적인 인과를 낳게 하는 하나의 징조로도 나타난다.
허균은 소설『홍길동전』을 써 우리 문학사에 우뚝한 봉우리로 솟았거니와 누이 난설헌과 함께 시인으로서의 광채 또한 전대의 시인들을 가리기에 넉넉했다.
그 뿐인가.『홍길동전』이 담고 있는 사회개혁의 사상과 그 스스로가 보여준 왕정제도의 혁신에 대한 실천적 의지가 그의 문학과 더불어 이 나라 역사에 꺼지지 않는 불길로 타오르고 있다.
교산에는 애일당(강원도 명주군 사천면 판교리)이 있었다. 애일당은 허균의 외할아버지 김광철이 참판까지 벼슬을 지내고 낙향해 은거하던 집인데 허균이 여기 외가에서 교산의 숨은 정기를 받아 태어났다고 일컬어오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주춧돌 하나, 기왓장 하나 보이지 않는 빈터만 있고 다만 푸른 대숲이 바람소리로 이 나라의 명문장을 낳게 한 바다와 산과 전설의 신비를 탄주하고 있을 뿐이다.

<승천 못한 이무기>
허균은 그가 쓴 『애일당기』에서 이렇게 그렸다. 「강릉부에서 30리에 사촌(지금 사천)이 있다. 동쪽은 큰 바다와 맞닿고 북쪽으로 청학, 보현, 오대 등 여러 산이 바라다 보인다…문을 열면 내의 동쪽에 있는 산이 북쪽의 오대산을 따라와서 마치 용이 기어오는 것 같다…지금 냇물이 소용돌이치는 깊은 곳에 늙은 교룡이 살고 있었다」고.
이 기록으로 미루어 교산은 교룡(이무기)이 살고 있었던 데에서 유래된 것임을 알 수 있는, 공교롭게도 승천하여 용이 되지 못하고 물 속에서 산다는 이무기의 전실과 허균의 삶이맞물려 교산은 암시적이고 상징적인 이름이 되고 있다.
저 허균의 섬광 같은 재기가 이 교산이 지닌 조화와 섭리에서 받은 것이라면 용광로처럼 끓어오르는 이념의 화신이어야 했던 것도, 끝내 반골의 칼을 쳐들어야 했던 것도 이 교산의 피가 뜨거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허균이 이 애일당의 주인으로 돌아온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가을이었다.
함경도 단천으로 피난 갔다가 아내와 아들을 잃고 어머니와 함께 다시 배를 타고 이 외가댁으로 찾아온 것이다.
이미 외조부가 돌아가신지 43년이 지났는지라 퇴락해 뜰에는 풀이 우거지고 대들보가 썩고 시판도 반이나 없어졌었다고 허균은 그때의 모습을 적고 있다.

<평생 안식처 삼아>
여기에서 그는 어머니를 모시고 애일당을 지키는 긍지를 세우면서 옛날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아 저승에 가서 외조부를 부끄러움 없이 뵐 것을 다짐한다. 그리고 여기에 머물면서 애일당의 뜻을 살려 시를 짓는 일과 저술에 골몰한다. 이후 그는 이곳을 안식처로 삼고 시심에 심지를 돋웠음을 많은 시에서 읽게 된다.
「사촌에 와서」
발길이 사촌에 다다르니
홀연히 얼굴이 풀리는구나
교산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돌아오는 주인을 반긴다
묽은 정자에 혼자 올라보니
하늘이 바다와 맞닿았구나
내 지금 봉래산에 와 있는가
아득하고 먼 여기.
(「지사촌」행지사촌홀해안 교산여대주인환 홍정독상천련해 아재봉래표묘간)
「명주를 그리며-」
벼슬길에 티끌바람이 몰아치면 명주에 와서 묻혀 살았었네
한식이 지나서야
나그네의 시름 더 깊은 것은
빗소리와 더불어
꽃들이 피어나기 때문이라네
저 높은 벼슬이 나를 잡아
끌지만
안개와 노을이여
어찌 그대를 버릴 수 있으랴
돌아갈 기약은 까마득한데
불현듯 소리를 지르며
글을 짓는 일이 헛되구나.
앞의「사촌에 와서」는 교산이 주인으로서의 돌아와서 느끼는 경개를 읊고 있고 뒤의 「명주를 그리며」는 관직에서 물러났을 때의 애일당 에서의 삶과 심정을 남김없이 그린 한 폭의 자화상이다. 그의 시는 전해오는 것만 7백50수가되나 유실된 것은 또 얼마랴. 그는 유·불·선에 깊이 몰입해 그의 시 세계의 근저를 이루고 있으며 서학(천주교)에까지 관심을 가진 것은 사상의 폭을 말해 준다.

<독창적 사상·시어>
허균은 시를 공부함에 있어 고전을 익힐 것을 말하면서도 답습이나 개성이 없는 동화를 크게 경계했고 일상어를 시어로 쓰는 것을 주장하면서「허균의 시는 허균의 시로 불리길 바란다」고 독창을 크게 외친다.
그는 어려서 이미 세인들을 두렵게 하는 재능을 보였었다. 오죽하면 매부 우성전이 재능 때문에 장래가 걱정된다고 했었겠는가. 쟁쟁한 벼슬을 하는 아버지 엽의 3남3녀의 막내로 태어난(1569년 11월3일)그는 형제들부터가 뛰어난 문장가였으니 글공부가 어떠했으랴.
맏형 성, 둘째형 부, 누이 난설헌은 허균과 더불어 조선조의 문장 일가를 이루게된다. 그러나 12세에 아버지를, 20세에 성을, 22세 때는 난설헌을 여의고 피난길에 아내와 아들을 잃게되어서는 마음에 깊은 그림자를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29세 때 문과중시에 장원급제해 높은 벼슬길에 나서게 된 허균에게 큰 변화를 준 것은1610년 진주부사로 연경(북경)에 가면서다. 그때 천주교 기도문을 처음 가져온다. 그 뒤 1614년과 그 이듬해 두 차례 명나라를 왕래하면서 중국의 시인 주지번 등과 깊이 사귀어 『난설헌집』을 중국에서 퍼내기도 한다.
그는 노비를 어머니로 둔 이달에게서 난설헌과 함께 글공부를 했는데『홍길동전』에도 나타나있는 그의 서얼신분의 철폐론은 그로부터 온 것이라고 보고 있다. 허균의 대표적 저서인『성소복부고(성소복부고)』에는 사회제도의 개혁을 촉구하는 글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유재론」과「호민론」이다.

<갈가리 찢긴 육신>
「유재론」은 신분과 관계없이 유능한 사람을 국가가 인재로 써야한다는 주장인데『예부 터 어진 사람은 천한 계급에서 많이 등용되었다』고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고『하늘이 사람을 냈음에 사람이 그를 버리는 것은 하늘을 거역하는 일이요, 거역하고서도 하늘에 비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고 호되게 꾸짖고 있다.
「호민론」에서는『백성들의 걱정과 원망이 고려말엽보다 더 하다』고 한탄하고『고달픔과 원망에 찬 백성들이 들고일어날 수밖에 없으며 곧바로 닥쳐오고 있다』고 경고한다.
허균은 당대에 시대를 앞서가는 개혁론자였고 또한 온몸으로 그것을 실천하려 했던 참 지성인이었다.
전통적인 유교의 가문에서 교육을 받은 그가 당시 지배계급들의 배척과 비난을 받으면서 불경을 공부하고 서학까지 받아들이려 했던 점도 그가 아니면 하기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소설『홍길동전』으로 신분제도나 빈부문제 등 경제제도의 개혁을 부르짖고 서얼의 등용을 강력히 주장했던 것도 대단한 용기였다.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하인준·김암·김우성 등과 무장봉기를 획책했으나 미수에 그치고 그 죄 값으로 1618년 8월24일 50세의 나이로 능지처참 당하게된다.
그의 육신은 갈가리 찢겨 한줌 흙이 되었겠으나 하늘을 찌르는 시혼과 사회개혁의 이념은 오늘날까지 살아 잠든 우리를 깨워주고 있다. 동해 거친 물살을 등지고 교산을 오른다. 나도 한마리의 교룡인 듯 꿈틀거리며 현실에 투철했던 한 시인의 뜨거운 숨결을 애일당 대숲에서 읽는다. <사진=신동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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