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세에 만학의 꿈 "활짝"-고교과정 졸업 이승희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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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가난하거나 딸로 태어난 죄(?)때문에 배움의 기회를 놓쳐버린 사람들에게 교실에 앉아 공부하고 졸업식장에서 졸업장을 손에 쥐어보는 일만큼 갈망하는 일이 또 있을까.
지난 21일 한국 의료보험 회관(서울 염리동)지하 강당에서 거행된 양원 주부학교 졸업식에서 졸업장을 받아든 4백여명의「주부졸업생」들은 꿈에만 그리던 소망이 이뤄지는 기쁨으로 결국은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
7천여평의 농사를 손수 지으면서 하루 왕복 6시간씩 차를 타고 다니며 어렵게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아든 이승희씨(53·충남 아산군 염치면 대동리 94)도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눈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요사이 며칠간은 기쁘고 가슴이 설레기도 했지만 지난2년간 힘겨웠던 일들이 주마등 같이 떠올라 잠이 잘 안오더군요. 한결같이 쉽지 않게 공부해온「양원」식구들의 사연들도 떠 오르구요.』
양원 주부학교란 정규학교를 다니지 못한 주부들을 대상으로 중·고교 교과 과정을 가르치는 일반 사회교육 시설. 그 동안 못 배운 설움을 풀려고 양원 주부학교를 거쳐간「주부학생」들의 수는 2천5백여명에 이른다.
2년 전 친구와 언니들의 소개로 이 학교에 입학했던 이 씨는 충남 온양에서도 버스를 타고 1시간이나 들어가는 시골에서 1주일에 세번씩 꼬박 꼬박 서울로 공부하러 다니던 모범생으로 주위의 귀감이 돼왔다.
『농사짓는 일과 6남매 뒷바라지하는 일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거기다 녹슨 머리로 뒤늦게 공부하려니 마음놓고 길게 숨돌릴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더군요.』
『쉰이 넘은 나이에 공부는 무슨 공부냐』며 반대하던 남편 채길범씨(55)에게 1년 동안의 설득 끝에 승낙을 받아내고 처음 얼마간은 집안일과 농사일·학교공부의 3중 역할을 힘든 줄도 모르고 해냈다.
한번은 타고 가던 버스사고로 병원에 실려가면서도「이제 공부는 집어 치우라」고 할까 걱정돼 아픔마저 잊어버렸다는 이씨는 오히려 남편이 위로하고 격려해주는 바람에 감격했던 순간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학교를 다닌 뒤부터 주위로부터 강하고 훌륭하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딸들도 우리엄마가 참 근사해 졌다는 말을 자주 하구요.』
고교에 다니는 막내아들이 낮잠을 자다가도『우리엄마도 열심히 공부하는데 내가 놀아서 되겠느냐』며 벌떡 일어나거나 밤늦도록 함께 공부할 때면 지식을 배워 가는 기쁨 이상으로 흐뭇했다는 이씨는 자녀와 남편과의 대화에서 소외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잘 표현할 수 있게된 것도 만학의 결실이라고 기뻐한다.
『항상 사용하던 우리말도 그 깊이를 알고 보니 위대해져 보이고 연립방정식도 척척 풀며 농촌 들녘에서 익는 곡식들의 신비한 세계도 알게 되니 세상이 달라져 보인다』는 이씨는 농촌의 주부들에게 곡식의 수확뿐 아니라 배움의 결실도 함께 가질 것을 당부하는 말을 잊지 않는다. 슬하에 2남 4녀. <문경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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