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포럼

법정 스님의 FTA 걱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보도된 바에 따르면 법정 스님의 말씀은 이렇다. "한.미 FTA 협상은 단순한 통상협상이 아니라 사회전환 프로그램이며 말로는 자유무역을 하자는 것이지만 실상은 강자의 보호주의에 불과하다. FTA가 체결되면 몇몇은 이익을 보겠지만 대다수 서민과 농민들은 큰 어려움에 부딪힐 것이다." 이런 FTA로 인해 농업과 생태계가 망가질 것이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했다. "우리나라 전 국토 가운데 산지가 64%, 농지가 20%다. 전체 면적 중 84%가 사실상 농민이 관리하는 땅인데 농업이 죽어버리면 이 생태계를 관리하는 사람이 사라지게 된다."

이런 말씀도 했다. "얼마 전 대통령이 '한.미 FTA로 농민들이 피해를 보면 농민들에게 생활보조비를 줘 먹여살리면 된다'고 말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국정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나라가 불행할 수밖에 없다."

한.미 FTA 반대론자들에겐 천군만마와 같은 복음(福音)일 것이다. 스님은 그러면서 우석훈씨가 쓴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란 책을 필독서로 권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머리가 띵했다. 8월 중순 대형 서점에서 한.미 FTA 관련 책을 뒤져본 적이 있다. 이때 찾은 책이 우씨의 저서와 '낯선 식민지 한.미 FTA'(이해영 저), '한.미 FTA 국민보고서'(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 정책기획연구단 엮음) 등 세 권이었다. 제목부터 으스스했다. FTA 협상 개시가 2월 3일 발표됐는데 불과 몇 달 새 이런 책들이 나왔다는 데도 놀랐다.

딱딱한 논문인 다른 두 책과 달리 우씨의 책은 독자를 겁주는 내용을 아주 쉽게 소개하고 있었다. 경제학을 공부하고 정부에서 환경 관련 국제협상에도 참여했다는 우씨는 한.미 FTA가 체결되면 평균 이하,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4인 가족 기준 연소득 6000만원 이하 한국인에겐 '지옥'이 펼쳐진다며 차라리 이민을 가라고 권유한다.

법정 스님뿐 아니라 웬만한 독자는 다 읽는 순간 "노무현 대통령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한.미 FTA를 하겠다는 것인가"라며 울분을 터뜨릴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책이었다. 여기에 6월과 7월 KBS와 MBC가 잇따라 방영했던 반(反)FTA 프로그램까지 본 사람이라면 한.미 FTA를 찬성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쯤 되면 정부의 무능력.무책임을 새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수많은 전문가가 협상 초반부터 한.미 FTA 체결을 위해선 미국과의 협상보다 국내 협상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런데도 정부가 대국민 홍보를 위해 한 일이라곤 토론회를 개최하고 장밋빛 환상을 담은 광고를 내보낸 게 고작이었다. 반대론이 어떤 논리를 펼지 초반부터 예상됐는데도 이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채 질질 끌려다녔다. 정부 자료라고 내놓은 것들은 일방적인 청사진만 담은 소책자나 딱딱한 논문들뿐이었다. 그러면서 "아직도 한.미 FTA 협상의 본질을 모르는 사람이 많아 안타깝다"(10월 26일 한덕수 한.미 FTA 체결지원위원회 위원장)고 말한다. '홍보'의 '홍'자도 모르는 사람들 같다.

며칠 전 서점에 다시 가 봤다. 이번엔 한.미 FTA를 지지하는 책 세 권을 발견했다. 지난달에 나온 '한.미 FTA 논쟁, 그 진실은?'(정인교 편), '한.미 FTA, 미래를 위한 선택'(한.미 FTA 민간대책위원회 펴냄)과 이화여대 최병일 교수가 최근에 내놓은 '한.미 FTA 역전 시나리오'였다. 앞의 두 책은 정부 주장을 되풀이하는 딱딱한 논문을 묶어놓은 것이지만, 최 교수의 책은 한.미 FTA를 객관적으로 보다 쉽게 서술하고 있다. 최 교수는 한.미 FTA의 본질을 우석훈씨만큼이나 쉽게 설명하면서 필요성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있다. 정부가 잘못하고 있는 점도 아프게 꼬집고 있다. 정부가 진작 했어야 할 일을 최 교수가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한.미 FTA에 관심이 있다면 우씨의 책과 최 교수의 책을 함께 읽어볼 것을 권한다. 특히 법정 스님께 최 교수의 책도 한번 읽어 보시라고 권해 드린다.

이세정 경제 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