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나카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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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총리가 정권 발족 사흘 만인 1982년 11월 30일 저녁 총리공관으로 초대한 사람은 지한파(知韓派) 세지마 류조(瀨島龍三)였다.

세지마는 '불모지대(不毛地帶)'란 소설의 실제 주인공으로 알려진 신화적인 인물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이끌었던 일본군 총사령부인 대본영(大本營)의 핵심참모 출신으로 종전 당시 만주에서 소련군에 잡혀 11년간 포로생활을 했다. 귀국 후엔 이토추(伊藤忠)종합상사에 취직해 회장까지 승승장구, 20세기 일본 현대사를 관통한 상징이 됐다.

나카소네가 세지마를 부른 것은 그가 한국의 권부와 핫라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지마는 일본 육사 후배인 박정희 대통령에게 수출 드라이브와 압축성장 전략을 자문했고, 전두환 대통령에게 올림픽 유치를 조언했던 인물이다. 나카소네는 집권 후 첫 과제를 한국과의 관계 정상화로 잡았다. 미국 방문을 앞두고 한국을 먼저 방문하고 싶었다. 세지마의 밀사외교 덕택에 나카소네는 83년 1월 전후 일본 총리로는 최초로 방한, 전두환 대통령을 만났다. 바로 이어 미국으로 날아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도 만났다.

총리가 되기 전 나카소네는 '풍향계'로 불렸다. 항상 권력을 잡는 쪽에 서는 변신을 거듭하자 '권력의 향방을 말해준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냉소적 별명이다. 나카소네는 "칼이 닿는 거리까지 접근하지 않으면 상대를 벨 수 없다"며 59년부터 장관자리를 줄줄이 섭렵한 끝에 권좌에 올라 보란듯 장기집권했다.

나카소네의 마지막 선택이 고이즈미(小泉)총리다. 나카소네는 지지기반이 허약하지만 자신과 '유전자가 비슷한'고이즈미를 밀어 총리 자리에 앉힌 공신이다. 나카소네가 주변국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85년 역대 총리로 처음 야스쿠니(靖國)를 참배했듯 고이즈미 역시 매년 야스쿠니를 찾고 있다. 나카소네가 '전후결산'이란 명분 아래 개헌과 재무장을 추진했듯 고이즈미는 유사법제를 만들고 이라크에 군대를 보냈다.

그런 나카소네가 56년 의정활동을 마감하는 불출마 선언을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 고이즈미의 개혁 때문이라고 한다. "창장(長江.양쯔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낸다"고 중국인들은 말한다. 창장의 도도한 흐름은 곧 역사의 불가역성(不可逆性)이다.

오병상 런던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