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마을] '거꾸로' 고무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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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작불이 따로 없네. 군대 가면 꺼지기 십상일 텐데…." 제 이모가 농담 삼아 어깃장을 놓았다. 둘은 '우리는 기필코 결혼까지 이어질 것을 맹세합니다'라고 쓴 종이에 서명을 하더니 증인으로 이모의 사인까지 요구했다. 논산 훈련소 입소 날. 부대장님의 훈시 중 간곡한 당부의 말씀이 있었다. "장병들의 여자친구에게 부탁드립니다. 장병들이 군 복무하는 동안 절대로 신발 바꿔 신지 마십시오. 탈영의 가장 큰 원인이니까요." 애석하게도 아들의 여자친구는 시험기간이라 그 말씀을 듣지 못했다. 그럼에도 '착할 선(善)'자가 들어가는 이름의 그 친구는 하루가 멀다하고 편지를 보낸 것이다. 얼마나 예쁘고 고맙던지.

그런데 상병 계급장이 익숙했을 무렵, 기어이 비보가 날아들었다. 헤어졌다고 했다. 이 무슨 날벼락! 난 고심 끝에 '착할 선'에게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엄마는 너희 둘이 언제나 유익한 사이이길 바란단다." 답장이 왔다. "저도 철이의 군 복무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그렇게 한 번 불 꺼진 무대는 조금의 미련도 없는지 그대로 막이 내렸다.

뒤늦게 조카의 실연 소식을 들은 애 이모는 "그때 괜한 농담을 했네"하며 맘 아파 했다. 아니다! 그 아이가 부대장님 훈시를 못 들었거든. 결국 훈시를 들은 엄마와 제 누나가 들은 값을 하느라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일 정도로 편지를 써 보냈다. 아들은 아들대로 이 악물고 견뎠으리라. 독서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 녀석이었는데 제대 때까지 읽은 책이 이전 분량을 훨씬 능가했고, 틈만 나면 운동을 해 복학 뒤에는 '헬스관장(?)'이란 영예로운 별명까지 얻었다.

아들 말이 얼마 전에 그 '착할 선'을 우연히 만나 밥까지 먹었단다. 혹시나 미련이? 아니란다. 아주 편안한 마음이었다며 "예전엔 참 예뻐 보였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이 엄마, 아픔만큼 성숙해지는 한 시기를 거뜬히 넘긴 아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박형배(주부.51.서울 상도5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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