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시절(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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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홍도야,우지마라』는 시작도 끝도 없이 만인의 대중가요로 불리어 지고 있다. 뭇사람들은 사연도 모르고 저마다 홍도의 오빠라도 된양 그 노래를 구성지게 불러댄다.
바로 그 홍도가 요즘 경주의 한 야산기슭에서 비명으로 나타났다. 비록 허리 부러진 비석이지만 기생의 신분으로 태어난 홍도의 일대기를 밝혀 주고 있다. 본명은 최계옥,자는 초월산,홍도는 주루의 애칭이었던 모양이다.
1778년에 나서 12살에 벌써 시와 붓글씨에 능통했다. 노래와 춤사위는 장안의 한량들을 매료시키고도 남을만 했다. 임금의 장인인 박상공의 바깥부인살이도 했던 홍도는 그 미모와 재능으로 하여 당세 풍류객들의 대모가 되었던가 보다.
45세 나이로 세상을 마치자 장안의 풍류협객들은 비명을 짓고,교방(기생학교) 동료들은 추렴을 해서 그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지금 새삼스럽게 한 기녀의 비명을 놓고 감동할 이유는 없지만 옛시절 한량들의 풍류랄까,늘 푼수에 맞는 생활은 오늘의 바삭 바삭한 시속으로는 한가닥 향수를 자아내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나라엔 역사상 이름난 기생들이 적지 않았다. 임진왜란 무렵 진주의 촉석루에서 왜장을 부동켜 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 논개는 이미 수주의 시를 통해 민족의 연인이 되었다. 평양 기생은 평판이 나 있지만 계월향이라는 여자는 임란때 평양에 입성한 왜군들에게 묶여 생활하면서도 연을 날려 왜군들의 동정을 우리 의병들에게 알려준 의기였다.
삼ㆍ일독립만세 때는 해주에서 다섯명의 기생들이 붓을 들어 자작 독립선언서를 쓰고 만세를 부른 일도 있었다. 월희,월선,해중월,형희,채주는 모두 그 이름들이다.
의기가 아니더라도 옛날의 기방여자들은 시와 글씨에 능하고,노래와 춤으로 멋을 알았다. 황진이는 기녀의 신분이었지만 재색과 금률,한시,시조,가창을 즐기고,소복단장을 한 수수한 매무새와 예의를 잃지않았다. 서화담과의 플라토닉 러브는 꿈만 같은 얘기다.
성과 미모를 한낱 값싼 상품이나 탐욕의 도구로 여기고,부도덕과 폭력의 온상으로 삼는 요즘의 세태와는 너무도 격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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