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입증'… 대한제강, 공정거래법 담합 조항 위헌 소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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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국내 주요 철강업체 중 하나인 ㈜대한제강이 공정거래위원회의 담합 판정의 근거인 공정거래법이 헌법에 위반한다며 공정거래법에 대한 위헌 소송을 제기했다.

대한제강은 25일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19조 5항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제청'을 대법원에 신청했다고 밝혔다. 대한제강의 소송을 맡은 법무법인 태평양은 "공정거래법 19조 5항은 경쟁당국(공정위)이 부담해야 할 합의(담합)에 대한 입증 책임을 사업자에게 떠넘기고 있어 헌법상 '자기책임의 원리' 및 '과잉금지의 원칙'에 각각 반한다"고 소송 제기 사유를 밝혔다.

공정거래법 19조 5항은 '사업자들이 담합을 약정한 명시적 합의가 없는 경우에도 부당한 공동행위(담합)를 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공정위가 담합 증거를 찾아내야 하는 게 아니라 사업자가 담합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하도록 한 것이다. 태평양 오금석 변호사는 "이는 마녀 사냥이 횡행했던 중세시대에 악마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도록 하는, 이른바 '악마의 입증'과 다름없어 죄를 진 것으로 의심을 받으면 무죄를 입증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대한제강이 위헌 소송을 제기하게 된 것은 4년 전 국내 철강회사들의 철근가격 담합 의혹에서 비롯됐다. 공정위는 철강회사들이 2002년 2월부터 2003년 4월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철근 가격을 인상한 것은 담합에 의한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에 대해 대한제강은 "철강회사들 임원회의나 실무자회의 등 가격 인상과 관련된 회의에 한 번도 참여한 사실이 없고, 시장상황에 따라 독자적으로 철근 가격을 결정했다"며 결백을 주장했고 검찰에서도 가격 인상 담합에 참여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그럼에도 공정위는 공정거래법 19조 5항을 적용해 대한제강의 담합을 사실로 추정하고 제재 처분을 내렸다. 공정위는 2003년 10월 대한제강 등 7개 철강회사에 시정명령과 공표명령을 내리면서 대한제강 47억3400만원 등 총 631억9100만원의 과징금을 7개사에 부과하고 검찰에 형사고발했다.

이에 불복한 대한제강은 2004년 7월 서울고법에 제재 처분 취소를 요구하는 행정소송을 냈으나 '악마의 입증' 조항 때문에 기각당했다. 이 사건은 대한제강의 상고로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며 이와 관련해 대한제강은 위헌소송까지 내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공정위 관계자는 "담합과 관련된 법조항 자체를 따지겠다고 나선 것은 처음"이라며 "소송이 진행돼 대법원에서 의견을 내라고 하면 대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대한제강은 연 매출액 3500억원 규모의 철강 전문회사로 증권거래소 상장업체다.

김동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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