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37. 해외기자단 취재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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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정면에 보이는 김일성 초상화의 ‘빛 반사’는 유엔 주재 북한외교관들의 요구로 제거된 뒤 잡지에 게재됐다.

간부회의에서 기사가 통과됐다고 끝이 아니었다. 조사부(Research Department)를 거쳐야 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조사부는 '성경 다음으로 신뢰할 수 있는 책'을 만들기 위해 최후의 관문 역할을 하는 부서였다.

기자가 아프리카 취재기사를 제출했을 경우, 조사부는 그 기사를 아프리카에 있는 미국의 대사관과 현지 전문가들, 국내 학자들에게 보내 검증까지 했다. 필요하면 조사부 직원이 직접 현장도 간다. 기사의 정확성을 위해서라면 지구 끝까지라도 다시 찾아가 확인했다.

그런데 내 기사는 확인해 줄 곳이 없었다. 북한으로 사람을 보낼 수도 없고, 미국에는 북한 전문가도 별로 없었다. 고심 끝에 유엔에 파견돼 있던 북한 참관인들에게 기사와 사진을 보여주기로 했다.

그들의 첫마디는 "실망했다"는 것이었다. 믿었기 때문에 편의를 봐줬는데 기사를 이렇게 썼느냐, 조선 사람이라 서방기자들 보다 잘 이해할 줄 알았는데 실망했다고 했다. 문장 하나하나를 조목조목 따졌다. 어차피 그들의 요구를 다 수용할 수는 없었다. 통계 수치 등 객관적 사실들만 확인했다.

하지만 그들이 끝내 물러서지 않는 것이 있었다. 한국전쟁의 발발 책임에 대한 부분이었다. 원래 기사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전쟁을 도발했다"고 되어 있었다. 남침이냐, 북침이냐 공방을 벌이다가 결국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전쟁을 벌였다(at war with the communist of North)"는 모호한 표현으로 바뀌고 말았다. 또 한 가지는 김일성의 얼굴이었다. 초등학교 교실을 찍은 내 사진에 김일성 초상화가 빛의 반사로 얼룩져 있었다. '수령님' 얼굴이 잘 안 보이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반사된 부분을 제거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북한 기사가 실린 '내셔널 지오그래픽' 1974년 8월호가 출간됐다. 유서를 써 놓고 북한으로 떠난 지 거의 1년 만이었다. 회사의 평가는 좋았다.

회장이 메모를 보내왔다. "어려운 환경에서 최선을 다한 당신의 기사와 사진은 탁월합니다. 축하합니다."

회장이 기사 하나로 기자에게 축하 메모를 보낸 것 역시 회사 역사에 없던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북한의 박오태에게서 온 편지는 나를 울적하게 했다. 왜곡되고 편파적이어서 실망스럽다고 했다. 한 달간 같이 지내며 인간적으로 친밀해진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 마음이 아팠다. 같은 내용을 두고 미국과 북한 양쪽 모두가 '편파적'이라고 하니 기가 막혔다. 하지만 박오태가 당을 떠나 개인적으로 마주 앉으면 나를 비판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 기사로 그해 미국 해외기자단(Overseas Press Club) 최우수 취재상을 받았다. 퓰리처상에 버금가는 권위 있는 상이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100년 역사에서 사진으로는 수차례 여러가지 상을 받았지만 취재상은 처음이었다.

이를 계기로 사진과 편집에 이어 기사에도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때까지 회사에서 세 가지를 모두 할 수 있는 사람은 윌버 개러트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나중에 사장에 올랐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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