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주의」못버린 통일원/조현욱 정치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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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통일원에 냉전시대적 비밀주의가 다시 내습하고 있다. 통일논의의 공개와 국민적 합의유도라는 측면에서 6공들어 잘 정착되어온 관행이 이 며칠사이에 갑자기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지난 2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여연구의장 명의로 8월15일 임수경양 위문단을 청주교도소로 보내겠다는 서한을 노태우대통령에게 보낸 바 있다. 이런 서한이 오면 지금까지 대개 통일원이 전문을 언론에 공개하고 언론이 알아서 보도하면 그만이었다.
북한의 각종 제의와 요구가 우리국민 다수의 감각과 맞지 않고,특히 동구의 변화후 초조한 가운데 우왕좌왕하는 모습들이 절절히 나타나 통일원의 북한관계 자료개방은 국민의 신뢰를 얻는데 적지않은 도움이 된 게 사실이다.
임수경양 위문단파견 서한만 해도 그렇다. 논리적으로나 법적으로 말이 안되는 소리라는 것을 대부분 국민들은 직감으로 느낀다. 가장 지독한 인권탄압에 수많은 정치범을 수용하고 있는 북한이 일방적으로 임양을 위문하겠다는 것은 「민족대교류」제의를 회피하면서 방북인사에 대한 재야의 석방요구쪽에 초점을 맞추려는 저의가 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통일원이 돌연 이상해졌다. 서한이 북한방송에 보도된 이틀뒤인 4일까지도 통일원 당국자들은 『처음 듣는 일』 『모르는 일』이라고 부인하기에 급급했다. 일부 당국자는 곤혹스런 얼굴로 『나한데 그런걸 물었던 자체를 없었던 일로 해달라』고 했다.
사연인즉 이러했다. 홍성철장관이 지난 2일 간부회의를 소집,『앞으로 모든 업무에 관해 기자들에게 입도 뻥끗하지 말라』 『부인하는 말조차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으므로 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는 것이다.
물론 홍장관으로서는 그런 지시를 해야 할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 자신 노태우대통령의 민족대교류선언이 발표된 바로 그날과 그 다음날까지 『판문점 범민족대회는 어떤 경우든 불허하겠다』고 공언했다가 나중에 『각계 대표가 포함되면 판문점대회를 허용하겠다』고 말을 바꾼 적이 있기 때문이다.
홍장관은 노대통령의 선언후 중간에 정부의 후속조치가 갈팡질팡했던 것이 다분히 언론의 「까발리는 보도」탓이었다고 민자당쪽에 설명한 적이 있다. 물론 그런 측면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제정세나 남북한의 상황전개로 볼 때 통일원이 지금 보수적 통일정책에 매달려 관료적 비밀주의로 일관할 때가 아니라는데는 상당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왜냐하면 대통령이 앞장서고 있듯이 전향적 대북자세로 통일을 앞당기는 작업에는 공개적 통일논의로 국민적 합의를 유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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