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태조로 등극하자 왕씨 성을 가신 사람들은 단지 구왕조의 왕족이었다는 한가지 이유 때문에 모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이것만해도 억울한데 다시 구멍 뚫린 배로 실어다 바다물에 빠뜨려 죽여버렸다. 고려수장이라고나 할까.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물론 정사인 『실록』에는 나오지 않는 비사이지만 이긍익의 야사 『연려실기술』에는 이 비화가 기록되어 있다.
이 야사에 보면 왕씨들이 탄 배가 물 속으로 가라앉는 현장을 목격한 한 스님이 있었다는 것이다. 평소 왕씨와 친근했던 스님이 석별의 정을 나누기 위해 현장에 달려갔던 것인데 뜻밖에도 엄청난 역사의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너와 나 사이에 푸른 바다가 가로 놓여있으니 산승인들 어찌하랴.』 왕씨의 한 사람이 스님을 향해 던진 마지막 한마디였다. 이 한마디 말이 5백년 뒤 이성계 자신의 후손들 입에서 다시 나오게 된다는 사실을 누가 알았으랴.
여담이지만 그때 그 배에서 헤엄쳐 나와 살아남은 두 사람의 왕씨가 있었다고 하며 그 후손이 지금은 2천호가 넘는 큰 식구로 늘어났다는 이야기다.
이긍익은 l8세기의 실학자로 유명하며 호를 연려실이라고 한 까닭은 아궁이의 불을 헤치는 막대기, 즉 부지깽이의 불빛으로 책을 읽는 청한한 선비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당쟁에 휘말려 할아버지는 죽고 아버지는 20년이나 유배당한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벼슬을 외면하고 산 이긍익. 그가 남긴 야사에는 그밖에도 많은 역사의 진실들을 담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 나라 야사 가운데 안정복의 『동사강목』이 또한 유명한데 『동사강목』 그러나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은 이긍익이 그 밑에서 살아야만 했던 조선왕조의 정치사였으므로 자칫 잘못하면 필화를 입을지도 모를 아슬아슬한 책이었다. 그렇게도 솔직하게 역사를 기록해 놓고도 그가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기이하다.
이긍익의 역사 정신을 계승한 분이 바로 한말의 황현 (『매천야록』의 저자)이요, 일제 때 당나귀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독립운동사를 쓴 송상도 (『기려 수필』의 저자)였던 사실을 돌이켜 볼 때 우리에게 이런 고전이 남아있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뿌듯한 일인가. 그러나 섭섭한 것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만든 책이 없다는 것과 그 때문에 독자를 잃고 있다는 것이다. 박성수 <정문연 편찬부장·한국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