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폭 피해 15,000여명 아직도 고통의 나날|일 원폭 투하 45주년 맞아 알아본 실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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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일본 히로시마에 제2차 세계 대전을 종식시킨 미증유의 원폭이 투하 된지 6일로 45주년.
그러나 아직도 원폭 투하 당시의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 한국의 원폭 피해자들은 종전 후 4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피해 보상은커녕 진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한일 양국간의 무관심 속에 고통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반세기동안 정신적·육체적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원폭 피해자들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 45주년을 맞아 새삼 원폭 피해 보상을 애절하게 호소하며 이 문제를 한일간에 반드시 물어야 할 쟁점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1945년8월6일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 된데 이어 9일엔 나가사키에도 원폭이 투하돼 36년간 일제 치하에 시달려온 한민족에겐 광복의 기쁨을 주었지만 피폭자들에겐 기약 없는 또 다른 고통이 시작됐다.
일제 말 이른바 「산업 전사」라는 미명으로 강제 징용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보국대에 끌려갔던 한국인은 줄잡아 7만여명. 이 가운데 4만여명이 하루아침에 목숨을 잃었고 종전 후 귀환한 피폭자만해도 2만3천여명이나 된다.
이들 중 45년이 지난 현재 이미 8천여명이 원자병과 합병증·후유증 등으로 숨지고 1만5천여명이 생존해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생존자들은 대부분 귀국 이후 원자병과 각종 질병에 시달리며 노동력마저 상실, 찌든 가난과 사회의 냉대 속에서 가까스로 목숨만 부지하는 등 한마디로 비참하기 이를 데 없다.
피폭자들은 20년전 처음으로 일본의 침략 전쟁에 따른 피해 보상과 치료를 촉구하기 위해 2천3백여명의 피폭자들이 살고 있는 경남 합천에 한국 원폭 피해자 협회 (회장 신영수·73)를 조직, 본부를 서울에 두고 합천·대구·부산·평택 등 전국에 6개 지부를 두었다.
그러나 이 단체에 등록된 피폭자 1세는 불과 2천73명. 대부분의 피폭자들이 2세와 3세 등 후손들의 장래에 미칠 나쁜 영향 을 우려, 등록을 기피하는 바람에 자생 단체마저 제 기능을 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들의 외로운 투쟁이 20년째 계속되고있다.
그나마도 73년12월 일본의 민간 단체인 「핵 병기 금지 협회」가 1천9백만엔을 모아 합천읍 합천리 705에 지상 2층·연건평 1백58평 규모의 원폭 진료소를 건립, X선 촬영기 등 20여종의 의료 기재를 들여와 경남도에 기증한 것이 일본의 한가닥 양심을 살린 최초의 의료시혜였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원자병을 치료할 전문의를 구할 수 없는 데다 당국 의무 관심으로 공중 보건의만 배치돼 근본적인 가료는 커녕 일반 보건 진료에 불과해 요즘엔 하루 10명 안팎의 환자들만 찾을 뿐이다.
81년 한일 양국간에 맺어진 원폭 피해자 진료 협정에 따라 일본 히로시마 원폭 병원에서 무료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길이 트였으나 그동안 도일 진료 혜택을 받은 사람은 전체 희망자 3천5백1명의 18·4%인 6백44명에 불과한 실정.
원폭 피해자 협회 합천 지부장 안영천씨 (64)는 『멀쩡한 우리 동포들을 강제로 끌어다 혹사시키고 원폭 피해까지 입혔으니 전문 진료 기관이라도 설립해줘야 되지 않느냐』고 일본 정부의 성의 있는 대책을 촉구했다.
협회 측은 그동안 일본에 대해 23억 달러의 피해 보상을 요구했으나 지난 5월 노 대통령의 방일을 계기로 일본이 40억엔의 원폭 피해자 치료기금을 제공키로 합의, 피폭자들의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당시 일가족 7명 중 부인과 아들·딸 등 4명을 잃고 자신마저 평생을 불구로 살아온 조차봉씨 (86·합천군 율곡면 율진리)는 『우리가 보국대로 끌려 갈 때엔 내선 일체라며 창씨 개명까지 시켰으니 원폭 피해 보상과 진료는 당연히 일본 정부가 책임져야할 문제가 아니냐』고 일본 정부의 태도를 개탄하며 치를 떨었다.
이에따라 원폭 피해자 협회는 6∼9일 사이에 지부별로 피폭 자위령제를 지내고 원폭 피해자들의 진료 문제와 피해 보상을 강력히 촉구하기로 했다. 【합천=김선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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