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한소 합작 드라머 『갈대밭의… 내달 현지 촬영』|동포들 애환 담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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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황량한 늪지대와 사막뿐인 중앙아시아의 불모지로 강제 이주 당한 한인들. 이들을 중심으로 낯선 타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소련내 소수민족의 생존과 투쟁의 역사를 그린 첫 한·소 합작 드라마 『갈대밭의 들고양이』가 다음달 소련 현지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본격적인 양국 문화 교류의 디딤돌이 될 이 드라마는 KBS가 소련 문단에서 손꼽히는 재소 교포 3세 작가 아나톨리 김의 작품을 소련 국영 중앙 방송국 (코스텔레-라디오)과 공동으로 제작하는 것으로 시청자들로 선 모처럼 우리들의 시각에서 본 동포들의 애환 어린 삶과 발자취를 드라마를 통해 더듬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다.
1913년전 후 조선말엽의 궁핍한 생활과 한일 합방 등으로 소·만 국경을 넘어선 조선인들의 이주에서부터 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에 따른 중앙아시아로의 대이동, 41년제 2차세계 대전을 거쳐 80년 브레즈네프의 실각까지 반세기에 걸친 얘기가 이 드라마의 배경. 말 그대로 갈대밭에 버려진 들고양이처럼 온갖 수모와 절망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은 우리 혈육들의 지나간 아픔들이 불모의 땅을 무대로 가슴 뭉클하게 펼쳐진다.
어머니의 등에 업혀 국경을 넘어 극동의 하바로프스크에 자리잡은 드라마의 주인공 신 마트베이는 대 이주 때 중앙아시아로 끌려간다. 소련 당국의 소수민족 차별로 12년간 시베리아의 강제 수용소 생활까지 하게되나 부모·처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라 마음 다져먹고 일한 덕에 집단 농장 위원장이 됐지만 주위의 흉계로 체포돼 모진 고문 끝에 숨을 거둔 후 넋이라도 아내의 혼과 함께 고향 땅으로 다시 돌아온다는게 이 드라마의 줄거리.
극중 효과를 높이기 위해 국내 남녀 탤런트·영화 배우 4∼5명이 주인공 등 주요 배역으로 나오고 알마아타시 조선극장 배우 20여명과 이주민 출신 등 소련 배우 20여명, 현지 엑스트라 5천여명 (연인원)이 등장, 당시를 생생히 그려낼 계획. 극동 지역에서 화물차로 이주 한인들이 실려간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좇아 바이칼호를 시발로 알마아타의 사과밭과 주변 산의 만년설, 우스토베의 간이역, 갈대밭 및 토담집, 타슈켄트의 집단 농장, 천산 산맥 부근의 사막과 검붉은 황야, 회교 사원과 함께 최근 공개된 악명 높은 시베리아 코르마 수용소의·전경 등이 화면 가득히 담겨진다.
그동안 국내 TV에서의 소련 소개는 간간이 있어 왔으나 우리 손으로 현지에서 드라마로 엮어 시청자에게 보여주기는 처음인 이번 계획이 이뤄지기까지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다는 후문.
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트인 물꼬로 양국간 왕래가 가능해지며 지난해 한민족 체육대회 때 방한한 아나톨리 김의 국내 작품 활동을 계기로 드라마 제작 분위기가 점차 무르익었으나 소련 당국의 행정 절차를 밟느라 일정이 늦어졌다.
그러나 개방 물결을 타고 외국과의 교류가 찾아지면서 아직 비자 발급 등 일처리 과정이 다소 매끄럽지 않은 일면 등이 있지만 이번 합동 제작을 놓고 소련 제작팀의 자세는 적극적이어서 우리측을 고무시키고 있는게 또한 사실이라고 제작 간부들은 전해 준다.
『대 이주 때 25만명 중 중간에서 열병과 풍토병 등으로 숨지고 17만명이 살아 남았죠. 지금은 45만명으로 늘어나 소련 사회에서 나름대로 자리를 잡아간 동포들의 성공담이나 세계 속의 한국인을 그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아 ! 이들은 이렇게 살았는가?」라는 동족이 겪은 삶의 동질성과 이질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생각입니다.』
연출자 김충길씨 (47)는 이번 드라마 제작을 통해 교포 신문 레닌기치 등 한인 사회에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판은커녕 쉬쉬하며 거론조차 어려웠던 중앙 아시아로의 이주를 놓고 뒤늦게 활발한 논쟁이 일며 극동지역의 자치구를 요구할 정도로 새로운 변화가 생겨나고 있다고 귀뜀한다.
연말께 2부작으로 국내와 소련에서 동시에 TV로 방송되고 35mm영화로 만들어져 해외에서도 상영될 이 드라마 촬영을 위해 8월말 제작팀이 출국, 두달여간 현지에서 촬영에 들어간다. <김기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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