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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제국' 미국은 어디로] 14. 기독교 원리주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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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텍사스주 웨이코는 인구 12만명의 아름다운 전원도시다. 야구팀 텍사스 레인저스의 '명사의 홀'도 웨이코에 있다. 거기서 28km 거리에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의 크로퍼드 목장이 있다. 미국이 1900년까지 세계 최대의 목화 생산국일 때 그 중심지가 웨이코였다. 19세기 웨이코-크로퍼드는 흑인 노예노동을 기반으로 농업 사회로 성장했다. 그래서 미국의 어느 고장보다 인종차별이 심하고, 반동적이고, 반(反)지성적이다.

워싱턴에 있는 뉴 아메리카 재단 연구원인 마이클 린드는 '메이드 인 텍사스'라는 책에서 웨이코-크로퍼드의 부시랜드와 거기서 남쪽으로 수백마일 떨어진 오스틴을 중심으로 한 린든 존슨 전 대통령의 존슨랜드를 비교했다. 같은 텍사스지만 이념적.문화적.종교적 성향은 별천지 같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부시랜드는 인종적.종교적으로 동질적이다. 종교는 앵글로-켈트족을 중심으로 한 남부 개신교 계열의 침례교와 감리교 및 그리스도의 교회가 주류를 이룬다. 반면에 독일 이민들이 개척한 존슨랜드는 종교적으로는 독일계 루터파와 가톨릭, 남부 복음파 개신교의 세력이 강하고 인종적으로는 멕시코계와 흑인이 많은 다원적인 사회다.

부시랜드는 남북전쟁 때는 남부연방을, 그 후에는 자주 극우단체 KKK까지 지지한 사람들의 후손들이 사는 고장이다. 존슨랜드의 주민들은 남북전쟁 중에도 북부연방을 지지했고, '링컨의 당'이라는 이유로 공화당을 계속 지지했다.

웨이코의 베일러대는 침례교회가 세운 대학으로는 세계 최대다. 린드는 1886년 웨이코대로 출발한 베일러대가 일찍이 프로테스탄트 원리주의의 본산으로 자리를 굳혔다고 말한다. 린드에 따르면 복음파 개신교도들은 그리스 철학을 의심하면서도 웨이코를 '텍사스의 아테네'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자유주의적인 존슨랜드 사람들은 "천만의 말씀"이라며 "웨이코는 '브레이저스 강변의 예루살렘'"이라고 말한다. 브레이저스는 웨이코의 한 귀퉁이를 흐르는 아름다운 강이다.

종교학부장 랜들 오브라이언 박사와 웨이코 침례교회협의회장을 지낸 폴 스트리플링 교수, 그리고 신학부의 레비 프라이스 교수를 만나러 베일러대에 갔다. 참나무와 호두나무, 짙은 핑크빛 꽃을 피운 크레이프 머틀이 우거진 넓고 아름다운 캠퍼스가 인상적이었다.

린드가 '메이드 인 텍사스'에 쓴 것과는 달리 이 대학 신학부와 종교학부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극단적인 원리주의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세 교수 모두 원리주의에 비판적이었다. 오브라이언 교수는 "이런 말하면 잘릴텐데"라는 농담까지 하면서 부시의 이라크 침공과 남부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의 교조주의적 성경 해석을 강력하게 공격했다. 그는 베일러대에 있으면서도 그가 졸업한 예일대 신학부의 '티'를 버리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구내 서점에서는 베일러가 역시 웨이코-크로퍼드의 대학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유명한 기독교 원리주의 목사.전도사.저술가인 팀 래해이와 제리 젠킨스가 공동으로 쓴 원리주의 종교소설 '낙오자' 시리즈가 많이 꽂혀 있었다. '낙오자' 시리즈 다섯권은 1천5백만부나 팔렸다. 그리스도가 재림하기 전에 7년의 대환란이 있고, 그 기간에 적(敵)그리스도가 뉴 바빌론에서 세계를 지배하고 러시아를 비롯한 북방과 주변 세력의 이스라엘 침공을 하느님의 신군(神軍)이 격퇴한다는 줄거리다.

어느날 순식간에 그리스도가 신앙심 두터운 수백만명을 하늘로 끌어올리는 '휴거(Rapture)'가 일어나 지구상 곳곳이 큰 혼란에 빠진다. 영화배우 로버트 레드퍼드를 닮은 30대의 루마니아 대통령 니콜라에 카파시아가 유엔 사무총장이 돼 유엔본부를 이라크의 바빌론으로 옮기는 결의안을 통과시킨다.

요한 계시록과 구약의 예언들을 믿는 사람만이 쓸 수 있고 반계몽적.반지성적인 원리주의자들을 열광시킬 만한 스토리다. 타임과 CNN 공동조사에 따르면 9.11 이후 미국인의 35%가 종말론에 관심을 갖고 있고, 17%가 세계의 종말이 자신들의 생전에 온다고 믿고 있으며, 59%가 묵시록의 예언이 실현될 것으로 믿는다.

원리주의자들의 비율이 이 정도면 미국 정치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94년 텍사스주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당을 장악하고 부시의 주지사 후보 선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그들이다. 투표율이 낮은 대통령 선거 예선에서 투표장에 갈 동기가 강한 그들의 지지는 절대적이다.

부시가 예선의 첫 연설을 사우스캐롤라이나주 그린빌에 있는 밥존스대에서 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학생들에게 다른 인종과의 데이트를 금지했던 이 대학은 가톨릭에 적대적인 기독교 원리주의의 종가(宗家)다. 98년 지사에 재선되고 2000년 대선에서 대법원 판결로 대통령이 된 부시가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의 지지에 힘입은 바 큰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부시는 나이 마흔 직전에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설교를 듣고 그때까지의 방종한 생활을 청산하고 기독교도로 거듭났다. 그레이엄 목사의 아들 프랭클린 그레이엄은 부시 취임식 예배뿐 아니라 9.11 1주년을 기념하는 국방부 행사의 예배까지 맡았다. 프랭클린 그레이엄은 이슬람을 '악의 종교'로 비판한 것으로 악명 높다. 부자 모두 원리주의자들인 것은 물론이다.

대외 정책에 대한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의 영향력은 그들과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연대'로 한층 강화됐다. 일부 네오콘은 9.11 직후 프랑스의 르몽드가 "이제 우리는 모두 미국인"이라는 사설을 쓴 것을 흉내내 "이제 우리는 모두 이스라엘인"이라고 선언했다. 이스라엘을 이슬람 원리주의 테러의 희생자로 묘사한 놀라운 순발력이다.

'힘에 의한 정의'에서도 네오콘과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은 서로 코드가 맞고 남부에 강한 군사문화와 가깝다. 기독교는 종교적으로는 유대교에 적대적이다. 팻 로벗슨 같은 사람은 반유대적인 발언을 자주 했다. 그러나 네오콘의 대부 어빙 크리스톨은 기독교 원리주의 목사들이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한 어느 정도의 반 유대적인 발언은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코멘터리'에서 밝혀 유대계 네오콘의 기회주의적인 유연성을 과시했다.

베일러대의 프라이스 교수는 신약에서 말하는 뉴 이스라엘은 상징적으로 오늘날의 기독교도 전부를 의미하는 것이지 고대고 현재고 미래고 간에 이스라엘을 문자 그대로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원리주의자들은 구약에서 말하는 이스라엘로 돌아가려고 해요. 원리주의자들이 로마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보는 것도 묵시록에 일곱개 언덕 위의 도시라고 나오는 말을 광신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이죠."

요한 계시록 14장에서 천사가 요한에게 이렇게 말한다. "무너졌다. 무너졌다. 큰 도시 바빌론이 무너졌다." 미국의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은 바그다드 함락과 후세인의 몰락을 묵시록의 요한과 구약의 예언자들이 말한 사탄의 도시 바빌론의 최후로 보고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기대할지도 모른다. 그들의 그런 해석이 거듭난 크리스천 부시 대통령의 네오콘 정부를 통해 미국의 세계 경영에 반영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웨이코(텍사스주)=특별취재팀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배명복 기획위원, 김민석 군사전문위원, 심상복 뉴욕특파원, 김종혁.이효준 워싱턴 특파원, 김진.최원기 국제부 차장, 신인섭 사진부 차장<bmbmb@joongang.co.kr>
사진=신인섭 기자<shini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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