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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은 쉽게 오지 않는다/고병익(시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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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통일이라는 말이 이제는 어느정도 현실감이 담긴 말로 쓰이기 시작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통일이라는 말은 민족의 비원을 담았을 따름이고 현실감이 적은 막연한 개념임을 면하기 어려웠다. 누구나가 이를 향해서 노력은 해야 하나,아무도 그것이 실제로 달성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할 그런 개념이었다.
물론 사람에 따라,처지에 따라 절실감과 현실감의 정도가 다를 것은 말할 것 없다. 부모처자와 갈라져서 월남해온 가족들로서 서로 생사의 소식조차 모르는 경우는 말할 것 없고,남편ㆍ아버지가 북쪽에서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는 이른바 월북자 가족들의 공공연히 나타내기 어려웠던 경우 비원으로서의 절실감은 다른 사람과 달랐을 것이다.
○현실감 담겨진 「통일」
또 국토와 민족의 분단을 원망하고 이것을 초래한 외부세력들을 저주하면서 우리의 기원을 「분단 몇년」으로 표시하고 민족통일을 향한 구체적인 한걸음으로 판문점을 향해서 행진을 전개하자는 젊은 대학생들의 안타까운 염원도 강렬했을 것이고,또 종교단체들이 통일을 기원하는 법회나 기도회를 되풀이해 열고 있는 속에서도 통일의 염원이 나타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런 온갖 노력을 쏟고 운동을 전개하는 당사자들로서도 통일이 곧 가능하다는 전망에서 보다는 마땅히 이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운동을 추진함으로써 어느 먼 훗날의 통일달성을 위한 기약없는 투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던 것이 요즘에 와서는 통일이 일반 사람들의 화제거리로까지 등장하였다.
개중에 이북의 명승지나 고향땅을 찾아보고,차몰고 돌아다녀 보고 싶다는 따위의 마치 관광여행 가는 듯한 경박한 이야기들은 지난해의 동ㆍ서독관계의 상황변화가 워낙 급격히 전개된 데에 영향받아서 나온 별뜻 없는 농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안이한 태도는 문제의 심각성을 희석시키는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이북이 더 가까이 느껴진 것은 사실이다. 작년에 이북의 물산들 몇가지가 비록 제3국을 통해서이기는 하나 처음으로 도입되어 우리의 백화점에서 판매까지 되었고,더구나 현대그룹의 정주영회장이 금강산 개발사업을 위한 조사와 협의로 초청을 받아서 북한을 다녀왔다는 것은 초청의 목적이나 대상으로 보아 실로 이전과는 큰 변화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6,7년전에도 수재구호물자를 북쪽이 제공해서 이쪽이 그것을 받아들인 이례적인 교환이 있었지만 이것도 단지 일회적인 사건으로 끝났고,이번의 금강산 개발사업도 과연 계속적인 진전이 있을 것인지 아직은 예측하기 어려운 노릇이다.
일반 국민들이 통일을 넘 안이하게 생각하는 것도 문제겠지만 정부나 정당이 그러하다면 그것은 더욱 문제다. 해방이후 반세기가 되는 1995년까지에는 무엇이 이루어지도록 할 것이고 금세기말까지에는 통일을 이룩하고 말겠다는 식의 발언은 책임있는 자리의 사람들로서는 할 일이 아니다. 아무리 사업의 추진을 위한 굳은 결의를 표명한 것이라 할지라도 상대가 있는 이런 중대한 일을 그렇게 안이하게 표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늘날의 사세의 변화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는 엄청나고 급속한 것이었다. 작년 11월 독일에서 베를린장벽이 허물어지고 크리스마스때에 루마니아의 독재자가 처참한 자세로 거꾸러지고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변혁은 당사자들도,그리고 가장 광범하고 치밀한 고도의 정보망을 펼치고 있는 미ㆍ소의 정상들조차 예측하지 못했음을 실토하고 있다.
○책임못질 말 하지말라
또 베를린장벽이 허물어지고 뚫어진 통로로 주민들이 환호성을 올리면서 오갔던 그 당시만해도 아직 두 독일이 내왕은 전면적으로 자유로워졌을망정 통일까지는 어떤 단계와 어떤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야 할 것인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였는데 불과 반년 만에 이제는 거의 확실하게 통일독일이 떠오르게 되고 말았다. 이런 대단한 변화를 견주어 보아 우리도 통일의 서광을 보게 되었다고 생각할 만도 하다.
유럽에서 사회주의ㆍ공산주의의 사상과 제도가 한세기 동안의 피나는 시험을 거쳐서 이처럼 갑작스럽게 실패의 판정으로 낙착되어간 현상은 실로 근세 사회사상사에서도 가장 뜻깊은 새 장을 여는 것이 되겠지만 아직 아시아에서는 이를 기대하기 어렵다.
중국에서도 문화혁명 이후 시장경제가 도입되고 마침내는 공산주의체제 자체에 대한 비판까지 나왔던 터지만 무자비한 천안문사건을 통해서 정치적 변혁은 허용할 수 없음을 나타냈다. 북한에서는 종래의 극단적인 경직성과 폐쇄성으로 보아 체제에 관계되는 어떠한 변화에 대해서도 더 한층 예민한 거부반응을 보일 것이 틀림없다.
통일에 대한 기대를 안이하게 품게 하는 것은 백해무익한 일이다. 유럽의 공산권과는 말할 것 없고 이웃 중국의 경우조차도 서로의 갖가지 내왕이 폭넓게 허용되어 왔는데 남북한간에는 편지 한장 교환할 수 없는 극단의 냉전적 대치를 40년간 지속해오면서 오직 바랄 수 있는 것은 우선 적의없고 평화적인 접촉과 내왕이 고작이라 할 것이다.
○안이한 기대 백해무익
그러니 접촉과 내왕을 넓히기 위해서 과감한 노력을 전개해야 하되 종래처럼 장기판 상대와 한수한수를 교환하는 듯한 고식적인 방식이 아니라 더 일관되고 체계적인 대응을 강구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상대방의 개방과 더불어 이쪽의 대비가 진행되어야 한다.
자유민주와 시장경제 체제의 우월성에 대한 홍보에만 주력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니고 있는 평등과 복지상의 취약점들을 솔직히 성찰해서 이에대한 보완책을 끈질기게 강구해 나가야 한다. 이것은 민주복지국가를 향한 국민적인 요구일 뿐 아니라 이북동포들을 포용하는 기본자세를 굳건하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한림대교수ㆍ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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