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그늘에 가리웠던 조선말 작품 재조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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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새로움이 부닥치며 삐걱거리던 조선 말기(1850~1910년), 그 혼란한 시대에도 예술은 건재했다. "문인화와 장식화의 양대 계보를 압축해 보여준 때"(홍선표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라고 평할 정도다. 그러나 진경산수화.풍속화가 풍미한 조선후기 미술에 뭉뚱그려져 그 진가를 드러내지 못했다. 당대 최고의 화가인 장승업 뿐 아니라 이한철.김수철.전기.남계우 등 '조선의 마지막 화가'들이 "우리도 한 그림 했다오"라고 지하에서 원성을 토해낼 일이다. 삼성미술관 리움의 '조선말기 회화전'은 조명받지 못한, 그래서 더욱 의미있는 조선말기 회화를 우리에게 선보인다.

#참신한 감각, 파격적인 화법

안중식의 '도원문진(桃源問津)'은 연두색 톤의 화려한 색감이 그림 전체를 휘감는다. 서양 수채화법을 연상케 한다. 남계우의 나비 시리즈는 또 어떤가. '화접도(花蝶圖)'위에서 날아다니는 나비는 종이 밖으로 막 튀어나올 것처럼 사실적이고 입체적이다. 붉은 색 꽃에 앉은 황금색의 나비. 색감이 절묘하다.

이처럼 조선말기 회화는 현대적인 감각의 화풍이 꽃피었다. 이를 주도한 것은 궁중에 속해있던 화원(花園) 작가들이었다. 장승업을 주축으로 안중식.조석진 등은 중국 회화풍에 자기만의 개성을 버무렸다. 중인 출신이 직업화가로 활동한 것도 한몫했다. 중인들은 외국의 문물에 밝고 진보적이어서 사대부 출신 못지 않은 예술 세계를 창출할 수 있었다.

묽은 먹을 흘려 산천을 표현하고(홍세섭), 돌과 나무의 형태를 간단한 선으로 뭉뚱그리고(김수철), 잉어 비늘까지 꼼꼼하게 그리는(조석진) 등 다양한 화법도 이 시대 화단을 풍성하게 했다.

#거부할 수 없는 추사의 그늘

개성이 남달랐던 작가들도 당대 문인화의 고봉인 추사 김정희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전시장 한켠을 차지하는'팔인수묵산수도(八人水墨山水圖)'는 당대 유명 작가의 그림에 추사의 품평이 실려있다. 이한철.허련.전기.김수철 등 여덟 명의 작가는 자기 화풍을 뒤로 하고 천편일률적인 남종화를 선보였다. 리움의 조지윤 연구사는 "자기 세계를 추구했지만 한편으론 추사의 눈 밖에 나기 싫어한 당시 화단의 성향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추사의 그늘은 그만큼 크고 강력했다. 리움은 추사 150주기를 기념해 특별실을 따로 마련했다. 보물인 '반야심경첩'과 예서대련 등 추사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리움은 전시와 더불어 11월 11일 '조선말기 회화전 학술 심포지엄'을 연다. 전시는 사전예약을 해야 한다. 내년 1월 28일까지. 매주 목요일은 예약 없이 오후 9시까지 관람할 수 있다. 02-2014-6901.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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