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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100만 속인 '스타 번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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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00만 부 넘게 팔린 올 상반기 최고의 베스트셀러 '마시멜로 이야기' 번역자가 유명 방송인 정지영 아나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사실이라면 엄청난 스캔들이다. 출판계에서 이 책의 성공 요인으로 정씨의 지적이고 단정한 이미지를 이용한 '스타 마케팅'을 꼽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별로 없다.

출판사 측은 보도자료를 내 "대리번역이 아니라 정씨와 전문번역가 김모씨 양쪽에 번역을 맡긴 이중번역"이었다고 해명했다. 김씨의 원고와 정씨의 원고, 원문을 대조해 가며 윤문(글 다듬기)을 했다는 것이다. 정씨는 이중번역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진 후에도 정씨는 사람들 앞에서 계속 "내가 '마시멜로 이야기'의 번역자"라고 밝힐 수 있을까. 출판사는 과연 '정지영 옮김'이라고 쓰인 '마시멜로 이야기'를 떳떳하게 판매할 수 있을까.

상식적으로, 윤리적으로 생각할 때 그러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담당 편집자가 원고를 받아 독자의 쉬운 접근을 위해 매끄럽게 다듬는 수준이 아니라 "오역(誤譯)과 퀄리티 문제가 우려돼" 전문번역가에게 원고를 따로 받아 고쳤다면, 이미 그것은 정씨의 번역이라고 보기 힘들다.

출판계에서는 "남의 원고에 이름만 빌려주는 '대리번역'은 암암리에 저질러지는 경우가 있어도, '이중번역'을 맡긴다는 건 해괴한 소리"라는 반응이다. 이는 정씨가 진짜로 번역을 했는지, 이중번역 사실을 사전에 알았는지 등과는 별개의 문제다.

이런 '해괴한 수단'까지 동원해야 했던 까닭은 명백해 보인다. '마시멜로 이야기'는 출간 당시에도 1억원이 넘는 높은 선인세(계약 시 미리 지급하는 돈)로 구설에 올랐던 책이다. 출판사 측도 보도자료에서 정씨의 번역자 기용에 대해 "당시 전사적 차원에서 책을 띄워야 한다는 중압감이 있었다"고 했다. 막대한 선인세 지불에 따른 압박이 정씨의 '이름'을 이용한 이 같은 편법을 저지르게 한 것이다.

이 책을 산 수많은 독자 중 상당수는 '정지영'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이미지에서 신뢰를 느꼈다고 볼 수 있다. 더 이상 공인을 이용해 독자를 속이는 행위는 없어야 한다.

기선민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