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희기자의뒤적뒤적] 나의 마지막 남은 검은 머리카락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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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나의 마지막 남은 검은 머리카락 하나
장 루이 푸르니에 지음
정신의 서가

추석 명절도 지났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렇진 않았겠지만, 흥겹고 풍성한 잔치가 끝난 겁니다. 가을이 성큼 다가옵니다. 곧 어깨가 시릴 때가 오겠지요. 이번 책은 인생의 가을에 관한 짧은 에세이 모음입니다.

지은이는 담백한 문장에 담긴 유머와 재치로 국내에서도 사랑받는 프랑스의 노(老)작가입니다. 그의 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의 증조할아버지도 돌아가셨고, 할아버지도 돌아가셨고, 아버지도 돌아가셨다…난 이게 유전일까 겁난다." 조금 쓸쓸하긴 해도 궁상스럽지 않은 내용들이 펼쳐질 것임을 짐작케 하는 구절입니다.

생일 케이크에 꽂힌 예순 개의 촛불을 끄려니 여러 번 불어야만 한다며 생일을 싫어하는 모습이 투정을 부리는 아이 같습니다. 마지막 남은 검은 머리카락을 안쓰럽게 바라봅니다. 매년 사진을 찍으면 자기 모습이 점점 딱해 보인다며 사진사를 좀 더 젊은 사람으로 바꿔볼까 궁리도 하고, 매일 아침 거울을 봐도 얼굴이 말이 아니라며 낡은 거울을 새것으로 바꿔야 할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풋사과는 딱딱하고 시어서 먹으면 이가 시리지만 쭈글쭈글하게 주름진 늙은 사과는 한결 달다며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늙은 사과가 되어가고 있는 나는 달콤해졌는가 자문하면서 말입니다. 덜 시고, 덜 쏘고, 어쩌면 한결 너그러워졌는지도 모른다면서 신문에 난 뉴스들을 물러나 멀리서 바라보게 된 사실을 짚어냅니다. 문득 "신문의 글자가 점점 더 작아지고 있어…"란 말을 할 때 우리가 늙어가고 있다는 걸 깨닫긴 합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작가가 노화의 의미를 모르겠습니까. "강철 같은 건강을 갖는다고 해서 녹슬지 않는 건 아니다"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려 짐짓 위악을 떠는 거겠죠. 그의 충고를 귀담아 들었으면 싶습니다.

"교과서처럼 말하지 말 것, 근엄하고 거드름을 피우지 말 것, 허튼소리 하는 법을 배울 것, 안경을 끼지 않은 채 어둠 속에서 암송할 수 있도록 시를 외울 것, 호기심과 야심을 잃지 말 것" 등입니다. "아침에 곳곳이 쑤신다고 투덜거리지 말 것, 50세를 넘기고도 아침에 일어날 때 아무 데도 아프지 않다면 곳곳이 죽은 것이란 사실을 기억하라"는 조언은 노화를 자연스레 받아들이라는 뜻이겠지요. 에피쿠로스라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죽음을 두려워 말라. 죽음이 왔을 때 당신은 이미 여기 없을 테니까."

푸르니에의 마지막 충고는 "바보로 죽는 건 최악의 죽음이다"입니다. 아름답게 늙으려면 평소에 남다른 노력이 필요한 모양입니다. 씁쓸하지만 늦건 이르건 이건 우리 모두에게 닥칠 현실이겠지요.

김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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