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배우들은 '生연기' 대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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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더 이상 틀에 박힌 연기를 하지 않는다. 굳이 복식호흡이나 정확한 발음, 표정연기, 그리고 기존 이미지를 깨고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려고도 않는다. 자신의 실제 목소리와 표정, 성격까지 그대로 드러내는 '생(生) 연기'가 대세이기 때문이다.

◆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그들의 '실제 연기'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그들이 드라마와 영화에서 선보이는 연기가 실제 그들의 일상 생활 그대로라는 것을. 물론 드라마와 영화처럼 극단적인 상황이나 캐릭터가 아니라, 화가 날 때의 모습이나 기뻐할 때 웃음소리 등 그들의 실제 모습을 연기에서도 그대로 보여준다는 뜻이다.

많은 관객들을 울리며 연기력 또한 눈에 띄게 향상됐다고 평가받는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하 우행시)의 주인공 이나영의 경우는, 극 초반 어머니나 가족들에게 냉정하게 쏘아부치는 모습을 연기할 때 그녀가 극단적으로 화났을 때 하는 행동들을 보여줬다.

한 연예관계자는 "기쁠 때의 표정이나 화날 때의 표정이 모두 이나영의 평소 모습과 흡사해 놀랐다"며 "실제 그의 모습이 극중 역할에 가장 잘 녹아 난 작품"이라고 평했다.

에릭(본명 문정혁)의 경우도 MBC '신입사원'에서 보여준 모습이 평소 어눌한 듯한 말투나 행동과 흡사해 눈길을 끌었다. '신입사원'의 시즌 2인 SBS '무적의 낙하산 요원'에서도 비슷한 캐릭터로 출연중이다.

이처럼 평상시 모습과 같은 배우들의 연기를 일반 관객들과 시청자들도 쉽게 알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이현우는 MBC '수요예술무대'를 진행하며 보여줬던 모습, 지상렬은 평소 예능 프로그램 등에 출연하며 보여준 모습을 드라마에서도 똑같이 선보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들의 등장에 시청자들이 기대하는 부분 역시 그러한 역할이기 때문이다.

◆ 시대가 변했다…'완성'보다 '친근함' 추구

과장된 동작과 복식호흡과 정확한 발음에 의한 발성 등 소위 '연극적인' 연기는 더 이상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기 힘들어졌다. 심지어 대학로 연극 무대에서조차 전통적인 연기 방식에서 벗어나 편안한 대화같은 발성과 연기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대형 공연장 대신 소극장이 중심이 된 연극은 관객과의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배우들의 성량과 큰 몸동작에 대한 물리학적인 요구가 사라졌고, TV나 영화에 더 친숙한 관객들의 취향도 변화에 한 몫을 했다.

드라마와 영화는 소곤거리는 목소리도 잘 잡아내는 녹음 기술 덕에 복식호흡이 뭔지 모르는 젊은 연예인들이 쉽게 연기를 할 수 있게 된 지 오래이고,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 대신 젊고 매력적인 청춘남녀 연예인들이 출연해 알콩달콩 연애담을 풀어내는 트렌디 드라마가 대세를 이루면서 요구되는 연기력 수준 자체가 하향 평준화됐다.

대개 주연 배우들의 연기에서 완성도를 기대하기 힘들어진 드라마들이 시청자들에게 어필하기 위한 방편은 친근함이다. 뭔가 어설프더라도 시청자들이 즐겁고 기쁘면 만사 OK다. 연예인들 또한 굳이 위험한 시도를 하기보다 시청자들과 관객이 원하는 이미지에 맞춰 안전한 선택을 하면 된다.

준비 기간이 한 달도 채 되지 않는 미니시리즈의 경우, 젊은 주연 배우들이 오랜 관록을 가진 배우들의 연기를 따라잡기란 요원하다. 이 경우 제작측의 입장에 배우들에게서 끌어낼 수 있는 최고의 연기는 '자연스러움'이고, 이 때문에 미리 구상한 특정 캐릭터에 배우들을 맞추기보다 배우들의 실제 모습과 행동을 반영해 캐릭터를 변화시킨다.

이렇다 보니 극중 캐릭터를 새롭게 창조하기 보다, 같은 배우가 다른 작품과 다른 상황에서 비슷한 색깔의 연기를 하는 양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 '生연기'가 빛낸 작품 vs 망친 작품

배우들의 '실제 모습을 살린 자연스러운 연기'는 그에게 딱 맞는 작품을 만났을 때는 시너지 효과를 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엔 오히려 마이너스로 작용하기 쉽다.

에릭의 경우 MBC '신입사원'이나 SBS '무적의 낙하산 요원'의 경우 그의 평상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연기톤이 역할에 잘 맞아 떨어진다. 어눌하면서 어설프고, 엉뚱한 면도 엿보이는 그의 캐릭터는 루키의 좌충우돌 활약상을 코믹하게 그린 드라마에 딱이다.

그러나 에릭이 영화 '6월의 일기'에 출연했을 때는 '신입사원'과 비교해 특별히 변한 것 없는 연기가 극중 역할에 맞지않아 혹평을 받았다. 디지털에 익숙한 신세대 형사라는 설정은 잘 드러나지 않은 데다 터프함보다 장난기가 더 느껴지는 그의 말투나 행동은 무거운 영화의 분위기와 겉돌았다.

이나영의 경우 MBC '네 멋대로 해라'와 영화 '아는 여자', '우행시' 등 장르와 성격이 다른 작품에서 비슷한 톤의 이미지와 연기로 성공을 거뒀다. 신비하고 다소 엉뚱해 보이는 이미지를 살리면서도 코믹과 멜로 등 각 장르에 맞게 밸런스를 맞췄기 때문이다. 반면 '영어 완전 정복'은 그녀의 엉뚱함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억지스러워 보인다.

영화 '우행시'는 이나영 뿐만 아니라 강동원의 '生연기'도 잘 살려낸 작품이다. 송해성 감독은 원작과 무관하게 주인공 윤수 역의 강동원에게 경상도 사투리로 연기를 시켰다. 강동원 특유의 뚱한 느낌과 먹먹한 목소리가 이 영화엔 부담이 될 수 있었지만, 오히려 그에게 고향 사투리로 연기를 시켜 편안하게 만들어 준 데다 사투리와 강동원 특유의 이미지를 매치시켜 작품을 위해 필요한 연기로 만들어냈다.

홍상수 감독은 배우들의 '生연기'를 끌어내는 데 있어서는 대가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를 거쳐간 배우들 김상경 김태우 유지태 성현아 예지원 김승우 고현정 송선미 등은 모두 그동안 보여주지 않았던 실제 모습들을 드러냈다.

'해변의 여인'은 김승우의 평소 남자다운 모습을 장난기와 바람기로 담아냈고, 배시시 웃으며 수줍어하는 고현정의 모습은 또 다른 엉뚱한 캐릭터로 영화에 녹아 들었다.

김승우는 '해변의 여인'과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서 잇따라 生연기를 선보이며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다. 평소 사람들을 잘 리드하는 성격과 독특한 언변을 영화에서 녹여내 사실감있는 연기를 펼쳤다.

그러나 '천군'에서는 김승우를 비롯해 박중훈 황정민 등 배우들이 극중 캐릭터에 충실한 연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기대했던 평소 그들의 이미지와 상반돼 거리감을 좁히지 못했다.

'자연스러움'과 '친숙함'이 대세이다 보니, 최민식 설경구 등 '명배우'들도 역할 선택에 신중할 수 밖에 없다. '파이란' '올드보이'로 이름을 떨친 최민식이 다음 작품으로 선택한 '꽃피는 봄이 오면'은 관객들의 외면을 받았다. 완성도를 떠나, "인생 밑바닥에서 꿈틀대는 루저"를 기대하는 관객들에게 이 영화에서 최민식은 너무 편안하고 따뜻했기 때문이다. 반면 '주먹이 운다'는 관객의 기대에 대한 어김없는 부응으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설경구 역시 '박하사탕' '오아시스' '실미도' '공공의 적' 등 치열하고 온갖 고생을 하는 역할에서 멜로로 급전향한 '사랑을 놓치다'에서는 쓴 맛을 봐야 했다. 아무리 명배우라고 해도 대세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머니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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