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 서두르는 북한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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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북한이 동구권 대변혁의 여파로 큰 몸살을 앓고 있다. 특히 그 변혁이 한국의 북방정책과 연결돼 한국과 동구권과의 기존 외교관계 틀이 일시에 무너져버리자 북한은 더욱 당황하는 눈치다. 북한은 이 같은 변화에 맞춰「내부단결의 극대화」를 위한 제반조치를 단행했다. 동구 등에 유학중인 유학생 소환, 대폭적 대사교체, 언론매체를 통한 사회주의체제 고수주입,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 조기실시 등을 통해 내부결속을 다지기에 안간힘을 다했다. 따라서 대외관계도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북한은 돌연 적극적인 외교공세로 나오고 있다. 미·일등 서방국가, 비동맹국가들에 대해선 순방·초청외교를 강화하고 소련 등 동유럽국가들에 대해서도 기존관계를 재구축하고 있다. 최근 들어 부쩍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고있는 북한외교의 배경과 전개과정 등을 추적해본다. 【편집자주】

<동구개혁에 "몸살">
북한의 전통적 우방이었던 동구의 사회주의국가들이 개방과 민주화의 길로 노선을 바꿈에 따라 한동안 갈피를 못 잡던 북한외교가 그 충격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
지난해 베를린장벽의 붕괴로부터 시작된 동구권의 대변혁은 지금까지 국제사회에서 북한을 후원하고 지지하는데 가장 앞장섰던 동구사화주의국가들이 앞을 다투어 한국과 수교를 하는가하면 심지어 거의 공개적으로 북한을 기피하는 상황으로까지 발전했다.
이러한 변화에 맞서 북한은 처음에는 동구권대사들을 소환하거나 유학생들을 불러 들이는 등의 방법으로 자신들의 불만을 간접적으로 표시했다.
그러나 상대방 국가가 이 같은 조치에 미동도 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깨닫게되자 북한은 스스로가 변화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따라서 북한은 동구의 변화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며 이들 국가들이 취하고 있는 개방과 민주화에 곁으로는 동조를 보내면서 외교적 실익을 찾자는 폭으로 방침을 바꾼 것이다.
이념적으로는 그들과 동조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경제적으로나 외교적인 협력은 계속 유지해 나갈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이런 점은 북한과 소련의 관계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북한은 소련에 대해 기본적으로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지한다고 표명하면서도 북한의 「독자적」사회주의노선에 대해 소련이 간섭치 못하도록 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다.
물론 과거와 비교해 볼 때 북한과 소련간의 관계가 서먹서먹해졌다는 징후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소련이 북한의 주한미군 철수주장이나 「고려연방제」안 등에 대해서는 지지하면서도 한국과의 교류를 가속화하고 있는 것이다. 남북한의 동시 유엔가입이나 교차승인을 인정할 가능성을 보이는 것 등은 두 나라간의 불편한 관계를 잘 반영해 주고있다.
이런 점에 대해 북한은 노골적인 불만을 터트리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련과 관계악화를 각오하고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북한은 여전히 소련으로부터 여러 부문에서도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원자력발전소 건설지원, 기계공업 및 경공업분야 협력, 합영사업의 확대 등 경제적 분야와 군사대표단의 상호방문, 정례적인 합동해군 군사훈련 및 최신무기 공여 등 군사분야의 협력 등이 여전히 필요하고 또 지속되고있다.
동구권과의 관계도 비슷한 처지다.
동구권국가들이 한국과 공식수교를 하는 등 새로운 사태를 맞아 북한은 불편한 심기를 보여봤지만 최근에는 기존의 통상경협관계를 유지하는데 노력하고 있다. 예컨대 북한은 올 들어 체코·불가리아·헝가리와 잇따라 통상협정을 조인했고 작년 말에는 동독·루마니아와도 통상협정을 체결했다.
이러한 동구국가들과는 달리 북한이 가장 고마워하면서 의지하고 있는 나라가 중국이다.
북한은 지난해 천안문사태를 계기로 민주화와 개방을 중단한 중국을 이념적으로 가장 가깝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지난 3월 중국공산당의 장꺼민(강택민) 총서기가 평양을 방문, 김일성과 회담시 김은 환영연에서 사회주의노선 고수와 중국과의 공동투쟁을 다짐했다.
사실상 사회주의국가 중 북한의 대남 정책인 ▲교차승인반대 ▲유엔동시 및 단독가입반대 ▲3자회담 및 주한미군철수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등을 유일하게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고 있는 나라는 중국뿐이다.
이렇듯 중국은 한국과 경제교류는 확대하면서도 북한의 외교노선을 모두 지지하고 있으며 장쩌민도 평양을 방문하여 이 같은 중국입장을 재확인해주었다.
이러한 중국이 올가을 북경아시안게임을 계기로 한국과 관계를 확대시킬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점에 북한은 초조한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북한의 로동신문은 4월30일자 논평에서 『중국은 남조선과 그 어떠한 정치적 관계도 맺지 않는다는 입장을 표명해 왔다』고 발표할 정도가 됐다.
북한은 가능한 한 중국과 소련이 한국과 공식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하고 국제사회에서 오직 자신들만 지지해 주도록 외교적 노력을 벌일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적인 변화를 자신들만 외면할 수 없다는 체념 속에 조용히 외교적 변신을 준비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영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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