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와 용서(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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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우리 속담에 『비는 장수 목 벨 수 있나』하는 말이 있다. 『비는 사람에겐 져주어야 한다』는 속담이나 같은 뜻이다. 우리 민족의 수더분한 성품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용서할 수는 있어도 잊을 수는 없다』는 속담은 서양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한맺힌 일에 겉으로는 용서해도 마음속까지 씻어버릴 수는 없다는 뜻이다. 독하기로 치면 서양사람들이다.
용서한다는 말의 「서」자는 「갈을 여」와 「마음 심」의 합자다. 용서를 비는 사람의 마음과 용서해주는 사람의 마음이 한결같아지는 상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상대방의 아픈 마음을 이해하고 어루만질 수 있어야 하며,용서하는 사람 역시 상대방의 비장한 마음을 이해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진짜 용서가 된다. 그것은 동양적 도량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요즘 노대통령의 일본 방문을 앞두고 한일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신경전은 무엇보다도 일본외교의 도덕적인 수준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일본은 우리 국민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을 건드리는 기본문제에 조차 성의는 물론 이해조차 없다. 이제 두 나라 원수가 만찬석상에서 축배를 들때 일왕은 미소를 지을텐데 그것을 우리 국민은 어떤 표정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일본 패전직후 점령군 사령관으로 동경에 진주한 맥아더장군이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얘기가 있다. 일본국왕이 맥아더장군을 찾아가 『전쟁의 책임은 전적으로 나에게 있다』고 고백한 일이다. 바로 그 일왕은 75년 백악관으로 포드대통령을 찾아가 『…내가 마음속 깊이 슬프게 생각하는 저 불행한 전쟁…』이라는 구름잡는 얘기와 함께 전후에 미국이 일본을 원조해준 것에 직접 『감사의 말씀을 드렸다.』
일본은 우리를 도대체 어떻게 보고 있는가. 미일은 서로 총을 겨누고 싸운 사이지만 우리는 일본 가까이 있는 나라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일본으로부터 온겨레가 생지옥,생고생을 강요당했다.
그런 우리에게 깊은 사과의 말한마디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는 말인가.
일본의 원로작가 시바 료타로(사마료태랑)는 언젠가 우리 한국 민족을 가리켜 『가죽같이 질긴 민족』이라고 했었다. 옳게 보긴 보았다. 일본의 속마음을 알고 있는한 우리는 일본의 과오를 용서하지도,잊지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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