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법률학으로 보면 완전 범죄는 없다 「경」등 실화기담 50편 소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도상 문국진 박사는 이름난 법의학자다. 문박사의 학문적 정륜은 『진료과오의 법의학』 『최신법의학』 『의료의 법리논』 『생명윤리와 안락사』 『약해』 『간호법의학』 등의 묵직한 연구저서들이 웅변하고 있거니와 물론 그의 진가가 난해한 본격 학문서를 높이 쌓아올렸다는 사실에만 머무를 수는 없다.
문박사는 우리나라 법의학을 실사구시 혹은 경세를 위한 학문으로 정착시키는데 결정적 구실을 한 인물로 꼽히고 있지만 사실은 그 특유의 필력으로 법의학에 대한 대중적 인식의 지평을 넓혀온 자상한 계몽주의자로서의 면모가 더 두드러진다.
그는 인명과 관련된 수많은 사건·사고의 현장에서 자신이 겪었던 법의비화들을 기억 속에 꼼꼼히 철해 놓았다가 이를 이미 『새튼이』 (85년·김영사), 『배꼽의 미소』 (86년·청림출판)등 두권의 단행본으로 묶어 세상에 펴낸바 있다. 두책 다 「속물적 현학주의」라든가 「문맥잇기의 무능함」 이란 자연과학자들이 빠져들기 쉬운 함정을 크게 벗어나 누구라도 쉽고 재미있게 읽어갈 수 있게 쓰여졌고 그만큼 세간의 호평도 모았다.
그가 최근 앞의 두책을 잇는 세번째 대중용 저서로 『지상아』(청림출판)를 내놓았다.
『요즘 와서는 범죄나 사고의 양도 양이지만 상식만으로는 접근이 안되는 기상천외한 폭으로 사건들의 질과 양상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법의학이란 감정으로 사실을 밝혀내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범죄나 사고를 미연에 방지한다는 차원에서 운용돼야 한다는게 저의 지론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사건·사고의 정체와 거기 얽힌 내막을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을 일반대중에게도 널리 알려 올바른 인식과 경각심을 일깨워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냄 이번에 출간된 『지상아』에는 책 타이틀로 내세운 「지상아 (지상아)」사건을 비롯해 그 자신이 사건수사현장에서 직접 겪었던 실화 50편이 실려있다. 「지상아」 가 그렇듯 예시되고 있는 이야기 모두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우리 상식의 허를 찌르는 충격적인 내용들이다.
지상아란 태아가 자궁 안에서 사망한 뒤 그 체내에 양수가 스며들어 표피가 떨어지고 수포가 생기는 등의 변화를 일으키고 또 내장이 연화하는 이른바 시태침연현상을 보이다가 급기야는 탈수· 위축의 과정을 거쳐 몸이 마치 종잇장처럼 얇아지는 희귀한 예를 의학적으로 부르는 이름이다.
책 속에 들어있는 「지상아」란 제목의 글은 매독에 걸린 한어머니가 머리 잘린 지상아를 분만하면서 겪게되는 당혹과 절망, 그리고 그 아기를 받아내는 산의와 지상아의 부모가 벌인 분쟁의 시말을 담고있다. 책 속에는 이 이야기 말고도 짝사랑하는 남자의 혀를 물어뜯고 상대방의 매질에 목숨을 잃어야 했던 애달픈 「고절녀와 설단남」의 이야기, 성행위에 대한 공포감 혹은 갑작스런 충격 등으로 교접 때 여자의 질이 불수의 경련을 일으키고 거기 갇혀 삽입된 남자의 성기가 빠져 나오지 못하는 현상을 실례로 설명한 「바기니스무스 (질경)」 이야기, 임신 4개월반이나 된 태아를 3개월로 속여 수술을 받다 낭패한 한 산부를 들어 무분별한 소파수술의위험성을 경고한 삼면사육」 이야기, 암에 걸린 환자에게 이를 사실대로 알러주는 것이 의사로서 과연 옳은 태도인가를 의료철학의 입장에서 성찰한 「사실고지」 이야기 등 만화와도 같은 기화일담들이 소개되고 있다.
이들 이야기는 일반의 흥미를 막연히 유발시키는 일종의「몬도가네이즘」 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 뒤에 다시 되풀이될 수도 있는 사건에 대한 교훈적 선례를 제공하면서 법의학이 실제정황에 적용돼 사건의 미궁화 방지에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가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완전범죄란 있을 수 없다는 인식이 보편화돼야겠어요. 흔히「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다」는 얘기들을 하곤 하는데 초동단계에서 검시나 증거수집에 철저를 기한다면 풀리지 않을 사건은 하나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문박사는 대학본과 4학년때부터 법의학에 뜻을 두었고 1955년 졸업과 동시에 신설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들어가 현장업무를 시작했다.
7O년에 고려대의대로 옮기고나서 부터는 후학양성에도 힘을 기울여 76년 국내에서는 최초로 법의학교실을 개설, 지금까지 운영해오고 있다. 박종철 군고문치사 사건때 양심발언으로 한동안 뉴스의 스폿라이트를 받았던 황적준 박사도 고려대 법의학교실에서 그의 훈도로 크게 아끼는 제자의 한 사람이다.
그는 64년 서울대의대에서 「석혈이 비만세포에 미치는 영향」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넘치는 학문적 욕구와 성취동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88년에는 다시 미국 컬럼비아·퍼시픽대에서 「의료과실에 관한 연구」로 법학박사학위를 따냈다.

<정교용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