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효경』(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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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옛 『효경』에 이르기를­,『신체의 모든 것은 부모로부터 받았으니 감히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고,몸을 세워 도를 행하고,이름을 후세에 떨쳐 부모를 나타내는 것이 효의 마지막이다』고 가르쳤지만 지금 그 효를 믿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감히 「어버이 날」에 맞추어 새 『효경』을 읊조리오니 혹 마음에 드시면 그대로 하겠습니다.
진작 부모님이 등 떼미시는 대로 일류유치원과 일류국민학교에 토끼처럼 뛰어들어가 그저 밤낮으로 공부만 팠으며,이제 8학군 고등학교에 보무당당하게 들어가 대학입시 공부에만 전념하고 있습니다.
과외는 시키시는 대로 하겠습니다만 이왕이면 과목당 60만원짜리로 해주시면 나중에 보답하겠습니다. 밤참은 저혼자 라면으로 대신해 어머님 수고 덜어드릴테니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저 때문에 밤잠 불편하시면 이웃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새벽에 돌아오겠습니다.
어느 대학,무슨 학과를 선택할지는 몽땅 부모님 뜻에 맡기겠습니다. 그래도 부모님 마음 놓이지 않으시면 꼭 한가지만이라도 약속 지키겠습니다. 적어도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고야 말겠다는 이 아들의 굳은 각오를 한번 믿어주셔요.
혹 이도 저도 다 뜻대로 안돼도 부모님 아직 기회는 남아 있사오니 너무 낙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모님이 그처럼 애지 중지 키워주신 아들인데,그 번듯한 이목구비,어디 내놓아도 처진 데 없지 않습니까. 이 허위대로 강남 부동산 부자집의 규수 하나 사귀지 못하겠습니까.
그래서 언젠가는 늘 섭섭해 하시는 부모님의 마음 흐뭇하게 해드리고,가슴 뿌듯한 나날이 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이 아들,그까짓 어머님의 밍크 코트 한벌 못해 드리겠습니까. 철 따라 부모님 쉬실 콘도미니엄 열쇠와 효도드라이브 할 수 있는 자동차도 빼놓지 않고 장만하겠습니다.
그 며느리 혼수속엔 아파트열쇠도 들어 있을테니 제집 걱정일랑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쯤되면 「서울에 있는 대학」 졸업한 것이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하지만 부모님,그런 것은 다 나중 얘기고 지금 제 호주머니속엔 분명히 본드도 없고,담뱃갑이나 디스코테크 성냥갑도 없으니 그것으로 우선 작은 효도를 대신 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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