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이종구 개인전 '국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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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짚모자 밑에서 구릿빛으로 그을린 얼굴이 빛난다. 장화를 신은 두 발은 당당하게 대지를 딛고 있다. 땅의 힘이 인간으로 솟아난 듯 기운이 넘친다. 그는 논밭을 가는 농부이고 생산자이다.

화가 이종구(49)씨는 고향인 충남 서산면 오지리에서 아직 농사를 짓고 있는 어린 시절 동무들을 그린다. 그들은 날로 피폐해 가는 농촌을 떠나지 않은 소 같은 사람들이다. '다시 오지리에서-내 친구 김기운' 옆에서 착한 눈을 끔벅이는 소 그림 '만월'은 두둥실 휘영청한 달로 희망을 버릴 수 없는 지금 우리 농촌의 현실을 말한다. 화가에게 농부와 소는 흔들리는 한국 사회를 뿌리에서 지켜주고 있는 버팀목이다.

"내가 그린 분들은 평생을 땅에 몸을 대고 노동과 생산의 희망 속에서 행복을 순결하게 기다리며 살아왔다. 농민 초상은 자신의 모습을 평생 드러내지 못한 채 오랫동안 가뭄이나 홍수 등 자연의 풍상까지 온몸으로 겪으며 한몸이 된 자연의 일부라는 느낌이 들게 한다."

22일부터 11월 4일까지 서울 소격동 학고재에서 개인전 '국토'를 여는 이종구씨는 이렇게 말문을 열며 "서구의 자본주의적 삶과 우리 삶 사이에 동일시할 수 없는 본질적 차이가 있음을 늘 생각해왔는데 오지리의 농부상은 그 한 상징"이라고 언급했다. 그가 1980년대에 시작한 '오지리' 연작은 쌀부대나 장지에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묘사한 농촌 붕괴의 다양한 모습으로 주목받았다. 미술평론가 이주헌씨는 "이씨의 농민상은 우리 미술이 표현해온 이 시대 농민상의 마지막 모습일지 모른다"고 평가했다.

이씨가 6년 만에 연 개인전에서 땅에 대한 그의 믿음은 농촌에서 국토 전반으로 넓어졌다. 지난 3년 여 매달려온 '백두대간' 연작은 작가의 말을 빌리면 "일반적인 풍경화를 넘어 과거의 영토를 회복하는 우리 민족의 '역사 풍경화' 같은 것"이다. 세계화에 따른 외래적 사고와 문화가 더 극성을 떠는 요즈음 그는 백두대간을 종주하며 "지역적 삶과 민족적 현실에 더 천착했다"고 고백했다.

옛 지도 위에 동그마니 올라앉은 정화수 사발에는 목숨 수(壽)자와 복 복(福)자가 선명하다. 압록강과 두만강이 장엄하게 펼쳐진 '영토-압록강에서 두만강까지'는 한민족사의 유장함을 심도있게 펼쳐 보이고 있다. 농부의 얼굴로부터 백두대간의 대장정으로 나아간 한 화가의 발걸음은 이제 우리 땅의 자연과 인간, 역사와 문화, 생태와 목숨을 하나로 엮는 대하의 세계를 그려 보인다. 02-720-1524.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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