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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몹 취재기] 붉은 악마티 입고 옆구리엔 웬 풍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e-메일과 문자메시지를 매개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특정 시간에 특정 장소에 모여 벌이는 깜짝쇼, 또는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는 플래시몹이 지난 18일 오후 8시 서울 강남 코엑스몰의 밀레니엄 광장 주변에서 열렸다. 9월 20일 저녁 서울 명동 거리를 때아닌 외계인 소동과 시체놀이로 들썩이게 했던 2차에 이어 한달 만에 3차 행사를 가진 것이다. 18일 플래시몹 회원으로 참가했던 서유진(가명.23.여)씨의 뒷이야기를 입수해 소개한다.<편집자 주>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18일 저녁 8시. 코엑스 밀레니엄 광장. 붉은 옷을 입고 풍선을 옆구리에 낀 국가대표(?) 선수들 스무 명이 줄 맞춰 광장에 등장하자, 광장 위 난간을 빙 둘러싼 약 2백 여명의 사람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한민국!", "오- 필승 코리아!" 등을 외치며 열광적인 응원을 하기 시작했고, 선수들은 호각소리와 함께 경기를 시작했다. 위에선 응원단들의 함성소리와 불꽃막대 응원이 계속됐고, 밑에선 풍선을 터트리며 열심히 경기에 임했다.

난데없는 이 소란에 지나가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이게 뭐야?", "저 사람들 누구야"를 외쳤다. 다음까페 '플래쉬몹'(cafe.daum.net/flashmob)의 3차 플래쉬몹(이하 플몹) 현장이다.

플래시몹은 '플래시 크라우드(flash crowd)'와 '스마트몹(smart mob)'의 합성어로, 이메일을 통해 연락받고 모인 사람들이 벌이는 '깜짝쇼'다. 지난달 명동에서의 2차 플몹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이후 여러 언론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한 플래쉬몹.

그 이후 까페 회원수는 10배 이상 늘었고, 이번 3차 플몹의 1차 신청자만 5백명. 참여신청이 쇄도해 2차, 3차에 걸쳐 신청을 받았다. 사람들의 관심이 높은 만큼 언론사들의 취재경쟁도 치열해졌는데, 까페 회원들은 사전에 인터뷰에는 일절 응하지 않기로 합의, 취재진을 맥빠지게 했다.

예정시각 30분 전, 생일에 따라 4군데로 나뉜 몹 지시서 배분장소에는 특이한 복장(기대했던만큼 그다지 특이하지는 않았다)을 한 '모버레이터'들이 몹 지시서와 그날의 소품인 '불꽃막대'를 나눠줬다.

암호는 "학생 두장이요!". 몹 지시서에는 간단한 상황 설명과 함께 시간대별로 해야 할 지시사항이 적혀있었다.

몹이 시작되기 전, 참가자들 못지않게 바빴던 것은 카메라와 수첩을 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던 언론사 취재진이었다.

이날의 주제는 "함성속으로-. 작년 6월을 되살려보자"였다. 따라서 복장도 붉은악마 티셔츠로 통일했는데, 취재진들은 시작 전부터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을 보면, 인터뷰를 시도하려 애썼다.

난데없는 카메라의 출동에 코엑스 경비측도 당황, 기자들과 경비원들간의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경비원의 설명은 '코엑스는 사유재산이므로, 취재활동을 할 경우 사전에 취재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 이에 반해 기자들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영업을 하는 곳은 이미 공공의 장소다'라는 논리였다.

한 기자는 광장 옆 월드컵 기념품을 파는 곳 지붕 위에서 촬영하려다가 경비에게 끌려나오기도 했다.

플몹의 재미는 '상상이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것. 누구나 한번쯤은 꿈꾸는 일탈을 다같이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플몹이 시작되기 바로 전까지도 누가 참여자인지 모른다. 시작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나만 바보되면 어쩌나'라는 두근거림은 야릇한 부담감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막상 시작되었을 때 불특정 다수 앞에서 다같이 망가지는 짜릿함, 참여자가 비참여자를 당황케 만들면서 느끼는 약간의 우월감. 이것이 바로 플몹의 재미다.

그런 면에서 이번 플몹은 짜릿함이 부족한 '한바탕 쇼'일 뿐이었다. 복장을 통일했기에, 장소에서도 누가 참여자인지 쉽게 알아볼 수 있었고,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 미리 특정 장소에 대기하고 있었기에, 시작 전의 두근거림을 느낄 수도 없었다.

또, 참여자가 하나의 행동을 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선수로 분장한 사람들이 주축이 되고 응원단은 부수적으로 전락해 버린 느낌을 지울 수도 없었다. 타인에게 주목받음으로써 짜릿함을 느끼고자 했던 기대가 충족되지 못한 것이다.

까페의 후기 게시판에 남겨진 글들에서도 이런 점이 나타난다. 선수들로 뛴 참여자들은 '짜릿하고 스릴넘쳤다'라는 의견이 대부분인데 반해, 응원단으로 참가한 사람들은 '재밌었지만, 응원이 통일되지 않았고, 산만했다'는 의견이 많았다.

일단 장소가 넓게 분산되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얘기다. 플몹 자체의 시간이 약 10분으로 너무 길었다는 것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깜짝' 놀라기에는 충격의 강도가 약했다고나 할까. 이런 와중에서 가장 신속하게 이루어진 것은 '해산'이었다. 호각소리로 경기가 종료됨과 동시에 누군가 "튀어!"를 외쳤고, 불과 10초만에 사람들은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졌다. 덕분에 취재하던 기자들은 이들을 인터뷰하기위해 코엑스에서 그들과 술래잡기를 하기도 했다.

어떤 카메라 기자는 겨우 붙잡은 사람 역시 기자라는 것을 알고, '상호인터뷰'를 하는 광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플래쉬몹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왜 하느냐"고 물으면 "그냥"이라고 대답한다. 플래쉬몹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이라는 말에서 흘러나오는 뉘앙스를 '그냥' 느끼면 된다.

혹자는 아무런 목적이 없는 행동을 하는 이들을 일종의 '사회적 강박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현대인의 몸부림'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그런 분석조차 거부한다.

이번 플몹에 참가한 Y양(24, 회사원)은 "그냥, 재밌을것 같아서"가 참가 이유라고 했다. "세상살이가 재미 없잖아요. 회사일도 맨날 똑같구요. 이유를 굳이 만들어낸다면, 아무나 느낄 수 없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라고 할까요?"

'상상이 현실로', '나는 세상의 중심이다'

플래쉬몹 까페의 대문에 써있는 말이다. 플몹을 즐기는 동안만은 상상했던 것이 현실이 되고, 참여자는 세상의 중심이 된다. 그냥 그것만으로 사람들이 어떤 의미를 느낄 수 있다면, 플몹은 그 자체가 하나의 새로운 문화 트렌드다.

이유없는 플몹이 점점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가운데, 다음주 25일에는 GFM(Global Flash Mob, 전 세계 플래쉬몹)이 열린다고 한다. 지금도 '몹 아이디어' 게시판에는 "장풍을 쏘자", "단체로 국민체조를 하자" 등 끊임없는 상상들이 쏟아져나온다. 이들의 상상력은 어디까지 발전할 것인지, 플몹의 미래가 궁금하다.

*플래시몹이란=e-메일과 문자메시지를 매개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특정 시간에 특정 장소에 모여 벌이는 깜짝쇼, 또는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다. 목적은 철저하게 비(非)정치적이다. 단지 즐기는 것, 공공장소에서 혼란을 유발하는 게 목적이다.

지난 6월 초 미국 뉴욕에서 처음 시작된 이래 몇 달 만에 유럽.남미.아시아 등 전세계 40여개국으로 급속히 번지고 있다.

뉴욕에선 대형 백화점의 양탄자 코너에 갑자기 몰려들어 '사랑의 양탄자'를 주문하고 사라졌는가 하면, 샌프란시스코에선 수백명의 사람들이 아이들 주변에서 원을 만들어 돌았고, 도르트문트에선 수백명이 백화점에 몰려가 모두 바나나를 먹었다.

최근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한 역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수백명의 사람들이 만세를 외치기도 했다. 한국 내 행사들을 주도하고 있는 '플래시몹 카페'(cafe.daum.net/flashmob) 는 7월 말 문을 열었다.

한편 플래시몹에 대해 언론의 취재 경쟁이 과열되면서 열성 참가자들은 언론이 플래시몹의 재미를 잃게 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심리학자나 사회학자들을 동원한 심리상태 분석에도 불쾌해 한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시키는 대로 깜짝쇼를 벌이는 플래시몹이란 것 자체가 회수를 거듭할 수록 싱겁고 재미없어지는 건 당연하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외국의 경우 '안티몹' 등 새로운 아이디어도 나오고 있다.

특정 장소에 특정 시간에 모이는 플래시몹과 반대로 특정 시간에 특정 장소에 있기를 거부하자는 것. 영국의 가디언지에 따르면 이런 안티몹을 제안한 네티즌은 "시카고의 중앙역 같은 곳이 갑자기 텅 빈 유령마을처럼 된다고 생각해보라"면서 "따로 '참가자'라고 할 사람들 없이 진행될 수 있으며, 그 이벤트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그 곳에 그 시간에 있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참가한 셈이 될 수 있는 획기적인 논퍼포먼스(non-performance art)"라고 주장했다.

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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