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에 스며든 「정권옹호」(교육 이대로 둘 것인가:5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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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잘못 지적땐 문제교사로 낙인/겉핥기 수업일쑤…학생들 가치관 혼란 심화
「교과서가 우리의 삶을 담은 문화적 자본이 되지못하고 밀쳐진채 지배 이데올로기의 한 수단이 되어왔습니다」
교과모임연합회 정모교사(38ㆍ서울)는 「지난53년부터 교과서가 이같이 제작ㆍ공급된 탓에 교사들은 양심의 혼란을 거듭해왔고 국민들의 비판을 샀다」고 했다.
교과서의 내용은 그 사회가 축적,발전시켜온 문화가운데에서 선택된다. 어떤 내용이 선택되고 어떤 내용이 배제돼야 하는가가 문제다.
특정한 지식을 공식화하고 제도화하면 한 집단에는 유리하고 다른 집단에는 불리하다. 결국 경제적 자본이 부당한 방법으로 불평등하게 소유ㆍ분배되는 경우처럼 문화적 자본도 사회집단간에 불균등하게 소유ㆍ분배되는 셈이 되고 만다.
실제로 73년 3차 교과개정때 유신체제 출범과 함께 비민주적 지배 이데올로기를 주입했고 81년 4차 개정때는 교육의 획일성과 정권옹호등 많은 문제들을 체험했다.
「초ㆍ중ㆍ고교에 국사ㆍ국민윤리ㆍ도덕ㆍ국어는 국정교과서 한가지뿐으로 사실상 체제옹호적으로 만들어진 점이 적지않았습니다.」
서울H중 한모교사(41ㆍ국어)는 「그렇다고 수업을 하지않을 수 없고 그런점들을 더 중요시하다보니 질문ㆍ토의에 의한 비판적인 사고력을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무엇보다 잘못된 체제옹호적 내용을 지적하면 「문제교사」로 낙인찍히기 일쑤인데다 바르게 가르쳐야할 교사로서 사명을 저버린 「양심의 자책」이 앞선다고 했다.
뿐만아니라 교과내용이 주지적으로 치중돼 활발한 토의식으로 전개되지 못한것도 문제. 왜냐하면 주지적 교육은 오로지 학업성적만을 강조하고 친구를 사귀거나 서로 협조하며 아름다움을 느끼고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즐거움을 중요하지 않은 「시간낭비」로 여긴다.
한교사는 「이같은 비교육적 교과내용은 학생들에게 학습동기를 유발케 하지 못하고 학습하는 과정자체에 흥미를 잃게하는 면이 많아 이른바「잠교육」(잠자는 교육)이 되고있다」고 지적했다.
학생의 지적발달수준이나 인지양식,흥미와 관계없이 주입식으로 강요하면 어린이는 학습 그 자체에서 기쁨과 만족감을 느끼기보다는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벌을 피하기 위해」억지수업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도 기껏해야 암기학습을 하는 것에 지나지않아 그 내용이 오래 기억되는 산교육이 되지 않고 잘못된 내용을 땜질식으로 지나치는 교육의 병폐를 뿌리박고 있다.
일선교사들은 이에따라 교과내용이 학생의 자발ㆍ창의성 형성과정의 의미를 지녀야 하고 학습자의 문화와 경험에 적합해야하며 우리사회가 안고있는 문제와 역사적 과제를 포함해야 한다고 했다.
교사들은 「이러한 것들이 결여되거나 왜곡되면 학생들에게 그릇된 사회의식과 역사관을 갖게하므로 교과서만큼은 정권의 수단이 돼선 안된다」고 주장한다.
예컨데 우리사회가 해결해야할 주요과제인 통일문제ㆍ공해 환경문제ㆍ민주적 문화의 창달ㆍ사회갈등해소ㆍ국제관계등에 대해 학생들에게 참여와 사고의식을 갖게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과서는 이같은 보편적 기준이나 제작과정ㆍ내용과는 달리 정권의 쳇바퀴에 따라 맴돌며 학생들에게 지배 이데올로기를 우선으로 비교육적 교육을 해왔다.
53년 1차 개정때는 일제식민지 교과내용을 거의 반영한 가운데 반공교육강화에 중점을 두었고 63년 2차개정때는 국가우선주의적 교육강화가 시작됐다.
2차 개정때부터 군사정부의 출현은 5공까지 체제옹호적 기술에 더욱 두터운 내용을 담아 학생들의 가치관 혼란현상이 심화된 것도 이때라는 교육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우리나라와 같이 정부가 교과내용을 독점하고 있는 것은 교육을 국민통제의 한 수단으로 삼는 교육 자주성의 침해라고 봅니다」
1차 교과개정때부터 교단에서온 교육경력 37년의 서울D고 황모교감(60)은 「학생들을 가르쳐 오면서 많은 과오를 저질렀다는 생각을 떨쳐본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정부가 교과서 제작ㆍ채택을 교사ㆍ학생ㆍ학부모들로부터 「백지위임」 받다시피한 나라는 선진외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미국의 경우 교사ㆍ학부모가 참여하는 지방교육위원회가 선택ㆍ권유하는 제도를 활용하고있고 영국은 완전 자유발행제에 자유채택제를 사용하며 지역특성을 살리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도 검인정제도란 전혀 없으며 교과채택은 교사의 권한인 동시에 영국처럼 완전자유발행제도다.
소련은 국가사업으로 소련연방교육과학부가 관장하고 있으나 우리나라와 다르다. 3∼4년간의 제작과정을 거친후 교과서작성 콩쿠르 대회를 열어 심사하는 제도를 가미해 선택의 폭을 넓히고 있다.
「들쭉날쭉인 교과내용이 하루속히 홀로서기 위해서는 자유발행제로 교과서정책이 바꿔져야합니다. 국정ㆍ검인정을 정부가 거머쥐고있는한 지배이데올로기 문제때문에 올바른 문화재산이 될수없다고 봅니다」
많은 일선 초ㆍ중ㆍ고 교사들은 『이같은 우려는 과거 지배세력이 교육내용을 자기이익의 수단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라고 들고 「더이상 잘못된 내용을 교육시키지 않기위해서는 정권옹호를 탈피하고 교과서를 우리의 삶을 담은 문화적 자산으로 발전시킬 인식의 전환과 정책대안이 과제」라고 했다.<탁경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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