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소나이트 가방이 법정으로 간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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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등장하는 '삼손' 처럼 튼튼하고 견고하다는 의미의 '샘소나이트' 가방.

이 가방 브랜드가 '백화점'이 아닌 '법정'에서 연일 화제에 오르고 있다. 현대차그룹 계열사 채무탕감 로비 공판에서 샘소나이트 가방이 로비 사건의 진위 여부를 가리는데 주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 뇌물과 관련한 혐의는 통상 관련자 진술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구속된 6명, '샘소나이트' 통해 돈받아 = 김동훈 전 안건회계법인 대표는 주로 샘소나이트 가방을 이용해 로비 대상자들에게 돈을 전달해 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검찰 조사와 재판에서의 진술 등을 종합해 볼 때 김씨에게 돈을 받아 구속된 7명 중 6명은 5000만원 이상의 돈을 받을 때마다 이 가방을 통해 전달받았다.

건넨 돈이 2억원을 넘을 경우에만 바퀴가 달린 여행용 가방에 돈을 담아 전달했다는게 김씨의 주장이다.

검찰은 수사 초기 김씨의 자택 압수수색 과정에서 샘소나이트 가방을 여러개 발견해 증거자료로 활용해 왔다.

또 변양호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이 2001년 7월12일 사무실에서 처음 돈을 건네 받았다는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직접 과천청사를 방문해 가방을 전달해 주는 시연을 펼쳐보기도 했다. 그만큼 이 재판에서 샘소나이트는 로비 의혹의 진실을 담고 있는 '판도라의 가방' 역할을 하고 있다.

◇'코트속에 감춰진 진실?'이 가방은 4일 오후 2시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1부(재판장 이종석 부장판사)의 심리로 열린 공판에 다시 등장했다. 이성근 전 산은캐피탈 사장의 변호인은 '지난달 21일 열린 공판에서 김씨가 돈가방을 만들어 전달해 준 방법에 대한 설명을 명확히 하지 못했다'고 전제하며 준비해온 버버리 코트와 샘소나이트 가방을 꺼내들었다.

변호인은 김동훈씨가 했던 진술에 따라 직접 손과 팔위에 코트를 덮은 뒤 가방을 잡고 여러 각도로 들어 올렸다.

변호인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김동훈 씨에게 "코트 사이로 가방이 훤히 다 드러나는데 상식적으로 공개된 장소에서 이 가방을 가지고 돈을 건넬 수 있느냐"며 "5000만원이 가방에 들어가면 무거워서 자유롭게 가방을 들지도 못한다"고 꼬집었다.

변호인은 돈을 건넨 장소가 주로 사무실, 시내 번화가의 술집 등 공개적인 장소였다는데서 김씨의 증언은 합당하지 못하다고 덧붙였다.

변호인이 직접 2~3분간 시연까지 했지만 김동훈씨는 "가방이 코트 사이로 보일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런 방식으로 전달한 것은 맞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변호인과 김씨가 서로 흥분한 듯 발언을 쏟아 내자 법정 내부는 금세 소란스러워 졌고 재판장은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판도라의 가방'속 돈뭉치들 = 한편 샘소나이트 가방에 들어갈 수 있는 돈뭉치 갯수에 대한 공방전이 이어지기도 했다.

변호인은 시연을 마친 뒤 "김씨가 지난 공판기일에 1000만원짜리 돈뭉치를 넣었다고 말했는데 이 샘소나이트 가방안에는 5개의 돈뭉치, 즉 5000만원의 돈이 들어가기 힘들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검 중수부 측 검사는 '변양호 국회 비디오테잎' 이후의 '반전'을 연출했다. 검사는 이런 주장이 나올 것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곧바로 확대사진 몇장을 꺼내 머리위로 들어 올렸다.

그는 곧이어 "샘소나이트 가방안에 1000만원짜리 묶음 5개가 들어가 있는 모습을 직접 증명해 본 사진이 여기 있다"며 변호인측으로 다가가 사진 내용을 확인 시켜준 뒤 재판장에게 사진을 증거로 제출 했다.

변호인은 "지난 공판 기일에 김씨 스스로 가방안에 4개 정도의 돈뭉치만 들어가는 것으로 안다고 시인했다"고 반론을 펴봤지만 사진속에 보이는 샘소나이트 가방과 5개의 돈뭉치는 변호인의 입장을 더욱 난처하게 만들 뿐이었다.

이에 재판부는 "검찰과 변호인 양측의 협조를 구해 실제로 사진처럼 1000만원 짜리 묶음 5개가 샘소나이트 가방안에 들어갈수 있는지 검증해 보겠다"며 "피고인석에 앉은 분들이 사회의 리더층의 위치에 있던 분들이니 양립하는 반대 논리 속에서 하나의 진실이 밝혀지도록 협조해달라"고 격앙된 분위기를 정리했다.

김동훈씨가 전달했다고 주장하는 샘소나이트 돈가방은 지금까지 '신종 뇌물 전달 수법'으로 알려지며 언론에 화제를 낳기도 했다. '가방도 뇌물 내역에 포함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나돌았고 '진술의 신빙성을 높이려고 김씨측이 고의로 특정 브랜드명을 지칭한 것아니냐'는 의혹(?)이 제기 되기도 했다.

여러 논쟁과 의혹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 '판도라의 가방'에 어떤 진실이 담겨 있을 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머니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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