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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 :64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전 남로당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대립/「조공」서 추천 권오직 소 유학/박헌영 사상테스트 한뒤 여비서와 재혼
나는 어느사이에 우익보수 거물들의 침실에까지 마음대로 출입할수 있게 되었었다. 김창숙ㆍ김구ㆍ조소묘ㆍ김원봉 등이다.
이들은 이승만ㆍ김성수 등과 대립되는 순수 우익 지도자들이었다.
해방일보에서는 처음부터 한민당과 이승만의 돈암장에는 기자를 출입시키지 않았다. 이에비해 동아일보는 처음에는 공산당에 기자를 출입시켰다. 그 기자가 김용갑으로 나와는 와세다 대학 동기동창이었는데 그도 얼마 안가서 말썽이 생겨 출입이 끊어지고 말았다.
어느날 심산과 백범은 이승엽과 이강국이 각각 공산당을 대표해 자신들에게 인사하러 왔었다고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들의 방문은 공식적이고 의례적인 방문이었다.
나는 심산과 백범을 만날 때마다 솔직히 공산당의 정책과 방침을 설명해주며 그들의 생각을 집요하게 따져 묻곤했다.
그리하여 해방일보 사장실에 들어가서 박헌영ㆍ권오직ㆍ조두원 앞에서 자세히 이야기해주었다. 내 생각은 서로 오해가 있어서 착오가 생기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입장은 달라도 심산이나 백범이나 소묘(본명은 용은)이나 약산(김원봉)이나 다같이 조선 민족지도자로서 존경하고 있었다.
내마음과 태도가 이러하니까 나는 양쪽에서 다 신임을 받게되었다. 박헌영은 다른 루트를 통해서도 그들에 관한 정보를 듣고 있었겠지만 나처럼 그들의 안방까지 들어가서 직접 이야기할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박헌영은 권오직 방에 오면 그들간의 기밀 이야기를 끝낸후 반드시 나를 불렀다.
그런데 박헌영을 직접 자주 만나니 처음 만날때의 인상과는 전혀 달라지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퍽 무서운 사람처럼 느꼈었다. 나는 좀처럼 웃음을 띠지않는 박헌영의 웃는 얼굴을 두어번 본일이 있다. 정말 천진난만한 얼굴이었다. 일제때 박헌영은 경찰의 수배를 받아 도망다니면서 경찰의 임검이 무서워 여관에는 들지 못하고 산속에서 지냈는데 며칠 굶은 뒤 밤에 산밑에 내려오니 논두렁에 호박이 달려 있었다는 것이다.
생호박만 봐도 침이 넘어가 몇번 망설이다가 훔쳐 따가지고 산속에 가서 풋내나는 것을 껍질도 벗기지 않고 다 먹었다는 것이다. 그러고나서 생각해 보니 『야! 내가 남의 것을 도둑질했구나. 민족해방투쟁을 하고 공산주의를 한다는 놈이 도둑질을 하다니…』하고 생각하니 자기의 신세가 서글퍼지더라는 것이다.
그때 그의 호주머니에는 돈이 38전밖에 없었다. 촌주막에서 10전만 주면 밥한끼 사먹을 수 있을 때였다.
그는 다시 산밑 논두렁에 가서 호박덩굴 밑에 3전을 호박값으로 놓고 왔다는 것이다.
박헌영은 지난 얘기를 들려주며 『비싼 생호박을 먹었어』하며 어린 아이처럼 순진하게 웃는 것이었다.
박헌영은 결혼을 두번 했다. 첫번째 부인은 이르쿠츠크파 고려 공산당 시절 상해에서 만난 주세죽이었다. 그녀는 상해에서 음악공부를 한 미모의 신여성이었다.
박헌영과 주세죽은 상해에서 서울로 돌아와 1925년에 조선공산당을 처음 조직하여 민족해방투쟁을 하다 박헌영이 체포되어 옥중에서 거짓 미치광이짓으로 병보석을 받아 출옥하자 함께 소련으로 탈출했다.
박헌영은 모스크바에 오래 머물러 있을수는 없었다. 사랑하는 부인 주세죽을 홀로 모스크바에 남겨두고 조국땅으로 잠입하여 또 체포되고 만다. 주세죽은 모스크바에서 홀로 남아 남편의 무사를 아침저녁으로 기원하다가 병사하고 말았다.
박헌영은 주세죽과 사별한 후 해방때까지 독신으로 지내다 자기 비서인 윤씨와 46세때 재혼했다. 후처인 윤씨는 바로 해방일보 편집국장이자 박헌영의 심복인 조두원의 처제였다.
조두원은 박헌영의 신변생활을 수발할 여자로 처제 윤씨를 소개했는데 공산당 간부의 결혼은 사상적 결합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몇달간 그녀를 비서로 겪어본후 재혼하게 된것이다.
그무렵 해방일보사장 권오직도 자신의 여비서 김두환과 결혼해 생후 처음으로 가정생활을 하게 되었다.
권오직은 안동 사람이었다. 그의 장형은 오설이고 중형은 오준이며 그는 셋째였다.
그의 장형 오설은 1925년 4월17일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가하고 그 이튿날 박헌영과 함께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했다. 권오직은 조선공산당 추천으로,실질적으로는 박헌영ㆍ권오설ㆍ조봉암 등의 추천으로 제1회 조선공산당 파견 소련 유학생으로 모스크바에 유학했었다.
그는 국내에 돌아온후 지하투쟁을 하다 체포되어 몇차례 옥고를 치르다가 최종적으로는 해방때 대전 형무소에서 출감했다. 권오직은 자기자신의 불굴의 투쟁경력과 동시에 그의 형 오설의 희생때문에 박헌영과 많은 동지들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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