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분수대] 소용돌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때로는 자신의 모습을 남이 더 잘 보는 경우가 있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숨가쁘게 요동치는 정국에 휘둘리다 보면 시야가 흐려지기도 한다. 오히려 한 걸음 물러선 외국인이 한국 정치를 더 날카롭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그레고리 헨더슨(1922~88)이 바로 그런 케이스다. 하버드대 출신의 헨더슨은 한국 정부 수립 직전인 48년 7월 주한 미국대사관에 부임한 젊은 국무부 직원이었다. 그는 48~50년, 58~63년 두 차례에 걸친 서울 근무를 통해 격동의 한국 정치사를 직접 겪었다. '한대선'이라는 한국 이름을 쓰며 한국인과 적극적으로 어울리기도 했다.

퇴임 후엔 자신의 체험과 관찰을 바탕으로 68년 '한국:소용돌이의 정치(Korea:The Politics of the Vortex)'를 펴냈다. 그의 눈에 한국 정치는 소용돌이나 회오리바람 쯤으로 비쳤다. 정치권력을 향해 모든 사회 구성원이 달려들어 경쟁하면서 회오리바람 몰아치듯 거대한 소용돌이를 형성하는 것이 곧 한국 정치라고 봤다.

그는 한국의 정치적 갈등과 대립이 정책.이념.종교와는 별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원래 획일적인 사회이므로 경쟁 분야가 다양하게 전개되지 못하고 권력 하나에 집중돼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정치는 다른 무엇보다 권력관계에 더 민감하게 움직인다고 했다.

또 권력의 하부는 상부로, 지방은 중앙으로 각각 빨려올라가는 소용돌이 속에선 권력분산이 어렵다고 그는 날카롭게 지적했다. 게다가 교육이 권력의 길로 들어서는 통로가 됐기 때문에 교육수준이 높아져도 권력지향적인 체질은 바뀌지 않는다고도 했다.

다분히 부정적인 설명이다. 그래도 그의 책은 35년이 지난 지금까지 국내 대학의 정치학 강의에서 자주 인용된다. 그의 안목이 탁월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국의 정치문화가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지지 않은 탓도 있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투표 발언으로 국내 정치는 또다시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다. 이번에는 권력 스스로가 의도적으로 불러 일으켰다는 점에서 '관제 소용돌이'인 셈이다. 그래서 정책보다 권력을 먼저 의식한 소용돌이가 되기 쉽다. 안 그래도 어수선한 국내외 상황에서 자칫 유례없는 광풍이 불어닥칠까 걱정된다.

남윤호 정책기획부 차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