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작 & 상영작] 핏줄 향한 질주 … 세 소녀는 용감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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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영화 '엄마찾아 삼만리'의 이탈리아 소년 마르코는 돈벌러 갔다가 소식이 끊긴 엄마를 찾아 밀항선을 타고 남미의 아르헨티나까지 간다. 호주영화 '토끼 울타리'에 나오는 호주 소녀 세 명의 엄마찾기 여정은 그보다는 짧다. 1천5백마일, 서울에서 부산을 여섯번쯤 오가는 거리다. 그러나 이들에겐 탈 것이 전혀 없다. 나침반도 없다. 가느다란 두 다리로 그저 걸어갈 뿐이다. 너른 대륙을 가로질러, 경작지에 토끼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쳐놓은 철조망이 엄마와 살던 마을 부근을 지난다는 것이 유일한 단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세 소녀 중에 가장 나이 많은 열 네살 주인공 몰리는 자연과 함께 사는 법을 안다. 그래서 위기의 순간마다 '개코'처럼 예민한 추적자의 매서운 눈길을 절묘하게 피하는 지혜를 발휘한다.

도대체 이들은 왜 이런 어려운 길을 가야 했을까. 세 소녀의 피부는 검고, 콧날은 뭉툭하다. 호주 원주민과 백인의 혼혈이기 때문이다. 원주민 보호국장인 백인 네빌(케네스 브레너 분)의 신념은 확고하다. 원주민과 백인의 중간인 이들을 엄마 품에 두어 원주민의 수준으로 '저하'시키기보다는 강제로 수용해 백인의 수준으로 '향상'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토끼 울타리'는 실화가 원작이다. 몰리의 딸인 도리스 필킹턴이 쓴 같은 제목의 책은 때맞춰 국내에도 번역돼 나왔다(황금가지 펴냄). 호주 정부의 이 같은 정책은 영화의 배경인 1931년은 물론이고 70년까지도 계속돼 10만여명의 원주민 자녀들이 부모와 생이별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고 한다. 할리우드에서 '긴급명령''패트리어트 게임''본 콜렉터'같은 흥행대작을 만들었던 필립 노이스 감독이 이 작은 영화의 메가폰을 잡게 된 것은 극적인 각본뿐 아니라 그가 호주 출신이라는 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실화를 영화로 만들기는 쉽지 않다. 감독은 '문명'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백인들의 비인간적인 정책을 통렬하게 비난하거나 응징하기보다는 스스로의 신념에 따라 가해자가 됐던 백인과 원주민 사이에서 미묘한 균형을 잡는다. 대신 소녀들이 얼마나 용감하고 현명했는지를 그려내는 데 집중하면서 이들의 손을 들어준다. 기막힌 모험 뒤에 더 기막힌 후일담은 짧은 자막으로 전달한다.

1천2백여명을 만나본 뒤 뽑았다는 세 소녀의 연기는 카메라 앞에 선 게 처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특히 몰리 역의 에블린 샘피는 영국 왕립 셰익스피어 극단 출신의 케네스 브레너와 마주해도 결코 주눅들지 않을 강렬한 눈빛을 발한다. 지방관객들에게는 미안하게도 서울의 극장 10곳에서만 17일 개봉한다.

이후남 기자

*** 토끼울타리 ★★★☆(만점 ★5개)

감독:필립 노이스

주연:케네스 브레너.에블린 샘피

장르:드라마

등급:전체관람가

장점:가족과 함께, 호주의 광활한 자연을 덤으로 볼 수 있다.

단점:통렬한 권선징악이나 영원한 해피엔딩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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