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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계속의 우리-변혁과 조정의 세기말|더불어 사는 의식 절실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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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우리는 이제 많은 변혁과 새로운 국제질서가 편성될 인류문명사의 21세기를 맞는, 금세기 마지막 10년의 문턱을 들어섰다. 흔히 「대전환기」로 표현되는 90년대는 그래서 우리에게 어느 때보다 철저한 각성과 세계사의 흐름에 뒤지지 않을 만반의 준비를 요구하고 있다. 다가온 21세기의 세계 인류문명사 속에서 한국과 한국인의 위상을 결정지어줄 앞으로의 10년을 이끌 시대정신을 모색하는 대담을 마련해 보았다.
▲이상우교수=90년대는 단순히 새로운 10년의 시작이 아니라 한 시대가 끝나고 미지의 새로운 세기로 넘어가는 대전환기입니다.
지금까지의 세계역사는 집단이기주의에 의해 이끌려 왔습니다. 공간단위로 형성된 고을이 민족과 국가로 발전했고 그들 집단들은 모두가 자기집단의 이익만을 추구했지요.
그러나 다가온 21세기는 공간의 제약성이 극복되면서 집단이기주의를 지배해 왔던 기본규칙들이 바뀌게 되고 공존과 화해를 바탕으로한 세계평화의 시대가 되리라고 봅니다.
▲안병욱교수=19세기의 역사가 변혁의 시대였다면 20세기는 전쟁의 시대였습니다.
21세기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주축으로 한 냉전의 벽이 허물어진 화해의 시대가 되리라는 징후가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90년대는 통상의 10년과는 달리 새로운 화해의 세기로 넘어가는 중요한 준비단계로 보아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그동안의 모든 갈등요인들을 찾아 마무리하고 새 시대를 맞을 채비를 해야할 시기입니다.
▲이=어쨌든 21세기는「평화공존의 시대」가 되리라는 건 거의 확실해 졌습니다. 이제는 다같이 살아남을 수 밖에 없으니까요.
전쟁이란 나만 내세울 때 생기는 것이지요. 평화란 나도 옳으면 상대도 옳을 수 있고, 나도 살고 너도 살아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그것은 원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극에까지 갔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현상입니다. 전쟁의 수단인 무기가 정도를 넘어서니까 나혼자만이 살수 있다는 생각에 한계가 온 것이지요.

<동구권개혁은 교훈>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라는 것도 이같은 시대변화를 고르바초프가 이해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고, 몰타체제의 시작도 공존시대로 들어간다는 선언입니다.
▲안=동유럽의 변화가 자본주의와의 대결속에서 나타난 현상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자본주의의 우월성에서 동유럽의 변화를 이해하려 한다면 시대적 흐름에 뒤지는 거지요.
사회주의의 변화는 인간세계가 한번쯤 겪어야할 경험입니다. 인간들이 가질 수 있는 갈등을 나름대로 경험한 결과에서 오는 변화라고 봐야지요.
▲이=동유럽의 변화는 자본주의와의 대결에서 승패로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변혁의 시도라는 점에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획일주의로는 시대의 흐름을 쫓아가지 못하겠다는 판단아래 다원주의로 가자는 것이지요. 이제 공산주의자들도 공존의 필요성을 이해하기 시작한 겁니다.
사회주의는 역사적으로 긍정적인 기여를 한 측면도 있습니다. 사회주의가 끝나고 있는 것은 역사적 역할을 다했기 때문이지 잘못된 체제였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안=그런데 우리는 그같은 시대적 조류에 너무 처져있습니다. 그동안 다른 나라와의 경제력 차이만을 메우는데 매달리다 보니 새 시대를 맞을 정신석·정치적·사회적·문화적 준비가 되어 있질 못합니다.
다시 말해 세계 사회질서의 근본적 변혁을 우리의 것으로 소화해낼 채비가 덜 되어 있는 거지요.
90년대는 1945년 이후 우리를 지배해 온 냉전의식을 과감히 떨쳐버려야 합니다.
모두가 화해무드로 가는데 우리만 구시대의 유물을 안고 있습니다.
동유럽의 변화를 단순한 붕괴나 몰락의 차원으로 이해하는 과오를 저지르지 말고 시대를 따르는 변혁의 교훈을 얻어내야 합니다.
▲이=우리의 90년대는 무엇보다 「공존과 화해」에 적응할 수 있는 체질변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남·북한 문제도 서로를 존중하고 공존하는 단계로만 가면 문제는 쉽게 풀립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통일은 기술적 문제에 불과한 거지요.
그런데 우리 내부에도 문제가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우리가 공존하자는 논리인데 반해 북은 이를 거부하는데서 문제가 생기고 있습니다.
동·서독의 경우도 동독이 공존에 동의하니까 문제가 해결되고 있는 것입니다. 북한이 공존에만 동의한다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안=남의 경우는 원칙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실천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북한이 공존을 거부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진정한 통일노력을 해 왔고, 또 그러한 노력을 유감없이 실천했다고 볼 수도 없지요.
▲이=자유민주주의라는 것은 공존입니다. 그러나 북한의 헌법은 특정 계층만을 인민으로 규정하고 그 사람들만의 세상을 만들겠다고 하고 있는데 이는 분명 공존에 어긋나는 거지요.
타협이란 게임규칙 자체를 인정할 때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우리는 축구규칙대로 하는데 상대는 럭비규칙대로 한다면 게임이 안되지요. 따라서 북한도 민주화를 해야합니다. 둘 다 민주화 되어야만 게임이 되고 공존이 되는 것입니다.

<편협한 사고 탈피를>
▲안=우리의 정치는 전세기적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사회의 순리적 발전조차 정치권이 막아 왔다고 볼 수 있지요.
▲이=정치권은 우리사회를 계층과 지역은 물론, 조그마한 자기 집단까지도 나눠 놓고 대립시키면서 자기이익을 챙겨왔습니다.
결과적으로 시대적 흐름을 역행한 이같은 정치는 엄청난 낭비를 초래했지요.
▲안=우리 정치권이 가장 시급히 해야할 것은 편견적 사고의 틀을 벗어나는 일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도 이제는 자본주의의 모순이랄까, 그런 문제들을 공개적으로 토론해야 하며 그렇지 못하면 자본주의 생존자체가 위험해질지도 모릅니다.
유독 한반도의 자본주의만이 실패하는게 아닌가하는 불안감이 들기도 합니다.
▲이=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중대문제의 하나인 「계급갈등」은 획일주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공존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면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안=생각만 바뀐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단 기간내에 변혁을 통해 해결해야할 너무나도 많은 문제들이 쌓여 있어요.
개혁이 선행되지 않고 공존의식을 수용하라는 것은 빈말로 끝나거나 호란만 야기시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한쪽이 일방적으로 항복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타협을 할 수 있어야 같이 살 수 있는 겁니다. 잘 잘못을 가리기보다는 더불어 살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가 민주화를 통해 국민의 뜻을 정책에 반영해야 하고 사회도 자생적인 자기논리대로 발전할 수 있게끔 규제를 풀어야 합니다.
▲안=그동안 우리의 문제는 수준이 낮은 사람이 수준높은 사람들을 끌고 나가려 하는데서 발생한 것입니다. 따라서 규제를 푸는 것과 동시에 다소의 진통이 있더라도 선진적 세력에 의한 「지도」가 필요합니다. 현 상황에서 자율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이=방향설정이나 중심세력이 있어야 한다는데는 동의하지만 특정세력의 「지도」라는 데는 단서가 있어야 합니다.

<노사간 조화도 중요>
가령 레닌의 말처럼 소수정예지식인 집단이 사회개혁을 이끌어야 한다면 효과적일는지는 몰라도 독선으로 흐를 위험이 있습니다. 따라서 또 다른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발전 속도는 좀 늦더라도 자연적으로 형성되는 시대정신에 따라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안=그러나 당연한 목표가 설정되어 있다면 시행착오와 낭비를 줄이기 위해서도 선도역할이 있어야 겠지요.
그동안 쌓여온 불합리한 찌꺼기들을 청소해내야 하는데 어제까지 통제기관에 있었거나 어용적역할을 했던 사람들에게 그 일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청산작업을 통해 공과를 논한 다음 어떤 사람들이 우리사회를 선도할 수 있는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이=나는 청산작업이란 것도 반대합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도 그 생각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어떻게 내 생각만이 옳다고 단정할 수 있나요. 그것은 모택동의 문화혁명과 같은 발상입니다. 한 사람을 위해 다른 한쪽이 희생되어서는 안됩니다.
▲안=공존이란 변증법적 통합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용서하고 기득권을 인정하는 공존이라면 손해보는 사람은 계속 손해만 보게 되는 것이지요.
▲이=어느 사회나 게임 규칙이 있어야 합니다. 그 규칙의 집합이 체제라 할 수 있지요. 체제를 인정하지 않으면 게임이 안됩니다. 규칙을 어긴데 대해선 응징이 있어야지요.
▲안=우리에게도 동유럽과 같은 개혁이 필요합니다. 자본주의에서 발생한 문제점들을 과감히 개혁해 나가는 자세가 시급하다고 봅니다.
기층민중들은 허리띠를 졸라매며 노동을 했는데 그 보상이 기대치를 훨씬 밑돌았습니다.그런 구도에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이=그동안의 고도성장은 과연 누구를 위한 성장이었느냐는 문제를 낳았습니다. 결과는 모두가 잘살자는 원래의 목적이 제대로 성취되질 못했지요. 따라서 이제는 목적에 충실하기 위해서도 분배구조를 고쳐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90년대는 나름의 한국적 페레스트로이카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분배정의라는 대전제를 위해 일방적으로 기업을 규제하고 의욕을 낮추면 기업이 없어지고 결국 노동현장이 없어지게 됩니다. 조화가 중요합니다.
결국 공생의 문제로 낙착이 되지만 양쪽 모두 한발짝씩 물러나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남북한 통일 큰 과제>
▲안=어쨌든 앞으로는 우리 내부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관계 종사자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서구학문이 유교문화에 길들여진 사고의 틀을 넓히는데는 기여했지만 일방적 소개로 인한우리문화의 무국적 현상도 일부 초래케 했습니다.
따라서 문화관계자들은 앞으로 단순한 현상분석이나 소개에 그치지 말고 앞을 내다보는 안목을 가지고 우리의 문제를 풀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해야 합니다.
▲이=시대정신 창출에 큰 역할을 하는 사람이 문화인들입니다.
때문에 문화인들이 우리 문제에만 집착하게 되면 국수화되고 결국 우리 모두는 뒤지게 됩니다. 민족적 안목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와 함께 세계시민 일원으로서의 안목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깥 세상을 우리에게 알리는 것도 문화인의 중요한 역할이지요.
▲안=90년대를 출발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는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로 나가는 토대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를 반성하고, 낙후된 정치를 끌어 올리고, 전 국민이 합심해서 민주화를 완성시켜야 합니다.
▲이=시대조류에 한발 뒤지면 고생하게 마련이고 우리는 늘 그래 왔습니다. 90년대는 대결의 시대에서 공존의 시대로 가는 전환기입니다. 이번만은 이같은 대전환기를 놓치지 말고 우리도 시대에 앞서가는 민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정리=이년홍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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