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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대만 동아시아가 떠오른다|세계석학이 본「90년대」(상)폴 케네디 교수 기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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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폴 케네디교수(Paul Kennedy·45)는 영국 옥스퍼드대 출신의 정통 역사학자로 88년 1월 『강대국의 흥망』이란 책을 펴 내면서 세계적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의 역사학은 학맥상 슈펭글러, 토인비등의 문명사관 입장에 서 있으나 그들의 사학이 갖는 단점인 관념성을 탈피, 국가·문명의 흥망을 경제력·군사력의 실제적 면에서 치밀히 분석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한 나라가 흥하고 있을 때 그에 맞는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쇠퇴의 측면에 들어서도 전과 같은 규모의 군사력을 그대로 유지, 쇠퇴의 길을 재촉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모든 나라는 그 국력(경제력)의 규모에 맞먹는 군사력을 유지하는데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관점에서 그는 현재 과도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는 미·소·서유럽국가들의 쇠퇴와, 그와 반대입장에 있는 일본등의 강국으로의 부상을 예언하고 있다.
격동의 80년대를 보내고 대망의 90년대를 맞았다. 20세기의 마지막 10년이 될 90년대는 과연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움직여 나갈 것인지 세계 석학들의 특별기고를 통해 조망해 본다. 저명한 역사학자인 폴 케네디교수(예일대)에 이어 프랑스 파리 국립정치대학(시앙스포)의 조르주 밍크교수의 글을 나누어 게재한다.【편집자주】
다사다난했던 지난 80년대에 세계 도처에서 일어났던 변화들을 우리가 어떻게 하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까?
북경의 천안문광장에서 베를린 장벽, 그리고 프라하까지…. 이런 변화들이 모두 불과 지난 반년사이에 일어났다. 이 사건들은 그 성격상 너무도 극적이고 엄청날 뿐 아니라 우리들의 의식에 큰 충격을 던지고 있기 때문에 당장 장기적인 전망을 하기는 어렵다.
역사는 결코 정지한 채로 있지 않는다. 인구변화, 새로운 발명, 통신수단의 발달, 기술이전…. 이런 모든 것들이 안류 역사를 정태적 상태로 있도록 버려두지 않는 요인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보」의 성공담은 결코 모든 인류에「무조건」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기술·경제적 변화가 어떤 사회(개인 또는 계급)에는 이익을 가져다 주었지만 또 다른 사회에는 불행을 가져다 주었음을 볼 수 있다.
지난 10년동안에도 지구상엔 두가지 중요한 변화, 즉 상승과 하강이 지역에 따라 진행됐다.
이 기간중 심각한 침체를 기록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동구사회주의 국가들이다. 이는 20세기의 가장 거대한 역사적 아이러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의 정치경제학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보다 인민의 생활수준을 더 공평하게, 더 효과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는 신념에 가까운 전제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가 약속한 유토피아와 꿈은 이제 악몽으로 나타나고 있다. 소련과 동유럽 전역에 걸쳐 집단화된 농업과 중앙통제형 산업은 개인의 창의성을 속박했으며 생산성 향상을 방해하고 노동자들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또 경찰국가체제는 새로운 창발을 억누르고 반체제 운동을 탄압해야 했다.
한편 경제는 서서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붕괴의 길을 갔다. 농업부문은 더 이상 인민을 배불리 먹이지 못하게 됐으며, 모든 산업은 낙후되어 빈사상태에 빠졌다. 주택사정도 최악이며 의료혜택수준도 날로 악화되고 있는 반면 부패와 암시장만 번창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정치경제학은 실패했으며 남은 것이라곤 경제적 침체와 정치적 예속이라는 가공할 결과 뿐이다. 지난 수년동안 동유럽을 여행한 서방세계 사람들은 사회 전체가 불만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한 불만들이 드디어 한꺼번에 폭발, 정치·경제적 자유를 요구하며 표면으로 분출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소련·동구 상황이다.

<경제 침체만 남겨>
이와는 대조적으로 지난 80년대 동아시아 국가들은 크게 진보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80년대시작 당시 일본은 이미 경제대국이었고, 그 뒤를 한국과 대만이 열심히 따랐다.
지금 동아시아지역은 마르크스주의 경제를 고집하고 있는 북한·베트남을 제외하곤 제조업·무역·투자에서 거대한 경제적 붐을 맞고 있다. 이는 침체와 하강의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는 동구권 경제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이 지역 국가들의 우수한 노동력, 교육에 대한 집중적 투자, 높은 저축률, 거대한 자본투자, 질 좋은 공산품, 수출 주도의 경제정책은 눈부신 성장을 기록했으며 국민 생활수준을 크게 향상시켰다.
한 조사연구는 이러한 성장추세대로라면 한국의 1인당 GNP가 21세기초에 가면 미국의 그것을 능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일본의 GNP는 현재 소련을 능가하고 미국의 GNP수준에 육박하고 있다. 우주공학·슈퍼컴퓨터·고화질TV등과 같은 하이데크 분야에서의 일본의 발전속도는 현기증을 느낄 정도로 눈부시다. 또 로봇공학과 자동화부문에의 투자규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제조 및 기술분야에서 거둔 놀라운 성공으로 수도 동경은 자연히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 탈바꿈했다. 일본이 안팎에서 거두고 있는 이같은 성공에 힘입은 「팽창」은 그 정도와 영향에 있어 주위의 경계와 불안을 사기도 하며 때로는 경악에 가까운 공포심을 느끼게도 한다.
이런 팽창주의는 자유시장주의자도,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닌 일본인 특유의 기업가 정신과 국가주도의 「국민적 노력」이 절묘하게 결합된 합작품으로 볼 수 있다.
최근의 사태변화중 가장 비극적인 경우는 중국이다.
중국정부는 일당독재를 유지하는 한편으로 경제 현대화 및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중국은 지난 70년대후반 이후 많은 어러움 가운데서도 괄목할만한 성삭을 이룩했다. 중국은 그러나 정치개혁 요구가 높아질 경우 이를 가차 없이 제압해 왔다.
현시점에서 천안문사태가 중국경제의 침체로 이어질 것인가의 여부를 논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그러나 지금 분명한 것은「진보」의 힘이 「안정」의 반발력에 의해 저지당했다는 점이다. 이는 길고 파란만장한 중국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중국 정치개혁 억압>
정치·문화적 차이는 있겠지만 이와 비슷한 논쟁이 오늘날 미국에서 조심스럽게 일고 있다. 최근들어 의회 의원들과 지식인, 그리고 이해당사자들인 기업가들 사이에는 장기적으로 볼 때 미국의 가장 큰 위협은 소련의 군사력이 아니라 「경제적 침공」 에 있다는 주장이 있는 것이다.
즉 미국이 재정적자를 줄이고 하강추세의 생산성을 끌어 올리지 못한다면, 또 실패투성이인 공공교육제도를 개혁하고 저축률을 높이며 첨단산업의 선두주자 자리를 되찾아 세계시장에 걸맞은 좋은 상품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미국은 일본에 밀려 참담한 쇠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위기론이다.
엘 레빈교수가 「미국재건운동」을 벌이고 있고, 은행가인 팰릭스 로하틴씨가 개혁운동을 벌이는 등 개혁지향세력이 변화를 추구하고 있는 것도 이와 관련된다.
이들 개혁지향세력들은 국방비 삭감·소비절약· 세법개정·교육개혁등의 개혁정책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기득계층은 현상황의 변함 없는 존속을 바라며 개혁주장들에 대해 강력한 반대입장을 취하고 있다.
미펜터건(국방부) 에서 작은 마을의 학교에 이르기까지 변화를 싫어하는 완고한 저항세력은 널리 분포돼 있다..
서구의 경우도 다를 바 없다. 서구의 여러기구들 사이에 80년도 초반 유럽의 경화증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유럽회의(European Commission)는 일본과 미국에 대한 유럽의「심하되는 열등감」을 공개적으로 경고했었다.
이같은 경고는 1992년으로 예정된 EC통합에 대한 논의를 다시 불붙였다. 유럽통합의 방식을 둘러싸고 격론이 벌어지는 와중에서 유럽경제공동체(EEC)와 동구의 관계에 대한 장래문제가 새로 대두됨에 따라 유럽통합문제는 다시 불확실한 상태에 놓이게 됐다.
이같이 급변하는 세계조류는 갖가지 문제가 산적해 있는 라틴아에리카·중동, 특히 아프리카국가들에 큰 시련을 안겨주고 있다.
이 지역 국가들이 동아시아국가들의 눈부신 상승곡선을 따르려면 그에 상응하는 조건을 먼저 갖추어야 한다. 다시 말해 헌신적인 노동력, 전 국민적인 교육에 대한 열의, 높은 저축률, 대규모 자본투자, 질 높은 제품생산과 수출주도형 체제확립을 위한 정책집중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같은 요소들에 의해 온두라스나 자이레·예멘등의 현상황이 설명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한국 뒤따를지 의문>
그리고 국제구호기구들의 노력과 제3세계에 대한 부채탕캄이 이들 국가들에 한국과 대만의 뒤를 따를 수 있는 길을 터 줄 수 있을지도 불확실하다.
이같은 부정적요소들을 감안할 경우 90년대에도 영양실조·약탈·내전, 그리고 종족분쟁등 이들 니라들을 상징해온 너무도 낯익은 이미지들을 떨쳐 버리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실권자 덩샤오핑(등소평)·레이건 전 미대통령·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서기장등 3인의 지도자는 80년대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등은 그의 강력한 지도력을 바탕으로 마오꺼둥(모택동) 치하에서의 무절제와 악습을 벗어나 중국을 개혁시키기 위한 이른바 4개현대화작업(농업·공업·과학·군사) 을 과감히 추진해 왔다. 등은 그러나 「경제개혁」과 「정치·법제개혁」을 엄격히 분리했다.
중국이 정치개혁 없이 경제개혁을 이룰 수 있을지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중국지도층은 두 가지를 모두 달성하고자 원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레이건은 그의 강한 개성과 함께 재정과 무역적자라는 이른바「쌍둥이 적자」를 미국에 유산으로 남겨 놓았다.
그의 후임자인 부시대통령도 이와같은 어려운 국내문제들을 해결하려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여서 레이건식의 무관심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서기장이 80년대 소련 및 세계에 미친 개인적인 영향력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고르바초프는 정치지도자란 「시대의 조류」를 따라 국가라는 배를 조타하는 항해사와 같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 비스마르크와 유사하다.
정치지도자들은 조류의 방향을 잘 알아야 하고, 변화의 바람이 어떻게 부는 지도 알아야만 항노를 제대로 잡을 수 있다.
고르바초프가 기존 선원들을 완전 장악하고 물 새는 곳을 수리하고 소련호의 전복을 막기위해 제때에 과적한 짐을 배밖으로 내던질 수 있을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그러나 그의 기술과 열정에 대해서는 감탄을 금할 수 없다.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우리들은 또 다른 많은 변화를 맞을 것이다.

<미군 감축 대비해야>
특히 한국의 경우 정책결정자들은 장기적이기보다 중·단기적인 구도에서 주로 국정을 운영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한국의 강래는 외부로부터의 영향에 많이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정부나 야당이 다음과 같은 우발적 사건에 대비할 수 있는 정책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첫째,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가 북한에까지 확산돼 동구에서와 같은 정권의 변화를 가져오고 북한의 미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둘째, 일본이 경제·과학기술면에서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90년대 동아시아에 있어 과거보다 더 큰 지배력을 행사하고 이에 따라 동경의 영향력이 확대될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셋째, 미소간의 대립완화가 가속화 돼 동아시아주둔 군사력을 포함한 양대국의 지상 및 해군력의 추가감축과 함께 「냉전종식」의 공개선언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넷째, 미국의 재정·무역상의 쌍둥이 적자와 달러화의 약세등 미국의 경제적 어려움이 계속돼 한국·오키나와(중동)·필리핀 및 일본주둔 미군철수에 대한 미국내의 압력이 가중될 가능성등이 그것이다.
강대국에 의해 상처를 받기쉬운 입장인 한국은 이로부터 발생가능한 우발적 사태들에 관심을 고조시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폴 케네디교수 약력
▲1945년 영국 월젠드이 온 타인 출생 ▲영국 뉴캐슬대 졸업 ▲옥스퍼드대에서 박사학위▲서독 본대에서 연구 ▲미국 프린스턴대 고등학문연구소, 서독훔볼트재단 알렉산더연구소 초청 연구원 ▲현재 예일대 교수, 영국 왕립역사학회 회원
◇주요저서=『태평양의 공격 1941∼43』『태평양의 승리 1913∼45』『사모아의 분규』『영국 해군지배력의 흥망』『외교이면의 실상』『영·독대립의 원인 1860∼1914』『전략과외교 1860∼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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