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해변의 여인 감독 홍상수-배우 고현정 '촬영 뒷담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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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식 연출, 고현정식 연기

"유학 시절이라 나중에 '모래시계''엄마의 바다'같은 출연작을 비디오로 봤어요. 참 특출난 배우구나 싶었죠. 그때는 이렇게 될 걸 생각도 못했는데. "(홍)

"저도 그랬어요. 감독님 영화의 팬이었지만. 처음 만났을 때 긴장했죠. 그동안 만난 분들 중에 'TV를 잘 안 봐서…'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감독님은 제 장면들을 다 얘기하시는 거에요. 그때부터 이 행복이 시작됐죠."(고)

홍 감독은 완결된 시나리오 없이 기본적인 설정만으로 출발해, 매일 그날 촬영할 대사를 완성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자연히 영화 속 인물에는 그가 관찰한 배우들의 습관.말투가 묻어난다. 일례로, 이번 영화의 여주인공 문숙이 "얼굴 너무 크죠? 잘라내야 하는데"하는 대사는 고현정이 평소 곧잘 하는 얘기다. 이런 작업방식이 당혹스러울 법도 한데, 고현정은 정반대다.

"너무 좋았죠. 이 영화의 제 첫 대사부터요. 첫 등장이 뒷모습인 것도 참 행복했어요. 늘 하던 걸 하면 지루하잖아요. 겨울날 쨍하는 햇살 같았죠. 대부분의 드라마를 한 게 10년쯤 전이고, 그 사이에 뭔가 의외성을 드러내는 걸 못했으니까요. 몸속 어딘가에 구겨져 있던 근육이 막 펴지는 느낌이 들었죠."(고)

"저는 배우들한테 제일 큰 도움을 받아요. 인물의 50%쯤은 제가 준비하고, 나머지는 배우의 몫이죠. 그 사람의 '결'이 여러 가지로 나오는 건데, 그런 맛을 전에 함께했던 다른 어떤 배우보다도 많이 얻었어요. 현정씨는 제가 감춰놓은 미묘한 부분까지 다 알아채더군요. 신기할 정도였어요. 여러 면에서 참 든든한 파트너였죠."(홍)

#남자의 영화? 여자의 영화!

'해변의 여인'은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서해안으로 여행을 떠난 영화감독 중래(김승우)가 작곡가인 문숙(고현정), 이혼위기의 유부녀 선희(송선미)와 차례로 관계를 맺는 얘기다. 여느 홍상수 영화처럼 남자의 욕망이 중심인 듯싶지만, 감독이 미리 정해놓지 않은 결말은 결국 문숙의 이야기로 끝이 났다. "초반에 촬영을 몇 차례 진행하고 나니 결말이 문숙의 이야기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게 감독의 말이다. 문숙과 선희의 관계 역시 중래가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발전한다. "두 여자가 한 남자를 두고 치사하게 굴면 안 되죠. 선택은 여자가 해야죠. 지옥이 그래서 지루한 거야"(문숙의 대사), "아 울 거 없어요. 그냥 이혼해버려요. 털어버리고."(역시 문숙의 대사)

이런 문숙은 과거 홍상수표 여자들과는 크게 달라 보인다. 돌아보면,'모래시계''엄마의 바다''두려움 없는 사랑'등 드라마 속 고현정은 강인한 여자였다. "나약함보다는 강인함이 편한 건 맞아요."(홍) 그런데 홍 감독의 이전 영화에 대해서도 고현정의 해석은 달랐다. "결국 (남자의) 뜻대로 된 여자들이 없었잖아요. 오히려 남자들이 안되 보였는데."(고), "여자들도 제 영화를 좋아하는가 하면, 남자 중에도 이런 얘기는 영화로 보고 싶지 않다는 반응이 있었죠. "(홍)

홍 감독의 또 다른 장기인, 너무 사실적이라 환상을 부수는 베드신도 이번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전에는 힘들어도 재미있었죠.'봐라, 이러니까 감추지'하면서 보여주는 쾌감이 있었죠. 근데 이제는 제가 질린 듯해요. "(홍)

#인생이 영화, 연기가 인생

감독은 고현정의 연기를 검객의 칼솜씨에 비유했다. "진흙덩어리가 땅에 떨어지기 전까지 누구는 한두 번 칼질을 하는데, 스무 번쯤 칼질을 하는 사람이 있잖아요"(홍). "저는 감독님이 매일 대사를 주는 게 좋았어요. 미리 시나리오가 있는 것보다. 어제 한 얘기가, 오늘 대사가 되고, 그게 입에 착착 붙는 게 참 재미있어요. 드라마 촬영 때도 쪽대본을 즐기는 편이었거든요. 저한테는 연기가 인생이에요. 저한테 없는 게 연기로 나오지는 않죠. 연기가 그때 그때의 제 상태예요."(고)

듣고 보니 고현정의 연기론은 그동안 여러 영화에서 들어온 홍상수의 영화론과 통했다.

글=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사진=변선구 기자 <sunni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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