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통일」재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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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조국산천의 가을 단풍이 북쪽으로부터 물들어 오고 봄꽃이 남쪽으로부터 피어 올라가건대 이 땅의 갈라선 민족이 만나 하나되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8일 오후4시쯤 서울형사지법 317호 법정에서 남북작가회담 추진과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회합·통신예비 등) 혐의로 기소된 고은 피고인(56·시인)이 최후 진술을 하고 있었다.
『동·서독간의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전환의 시대는 오늘의 우리가 내일을 어떻게 개척하느냐에 따라 우리 민족에게도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 없이는 분단은 영원히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고피고인은 자신의 최후진술이 담긴 2백자 원고지 22장을 차례로 넘기고 있었고 최후진술에 앞서 고피고인에게 징역2년·자격정지 2년을 구형한 검찰과 재판부·변호인, 그리고 방청객들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우리가 제의한 남북 작가회담은 피고인이 갇히면서 함께 갇혔습니다. 그러나 45년에 걸친 분단을 사상적·정서적 측면에서 소멸시키기 위해 남북의 문인들이 만나야 한다는 당위는 결코 내버려 질 수 없습니다.』
구속 기소된 뒤 법원의 보석결정에 따라 불구속 상태로 법정에 선 고피고인에 대한 첫 공판이 진행된 법정에는 검찰직접신문과 구형에서 피고인의 최후진술까지 여느 시국사건 공판정에서와 같은 요란한 구호·노래와 박수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자의적인 대북 접촉이 초래할 국가안보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검찰과 피고인, 이 다툼을 경청하는 재판부와 방청객 모두의 통일을 위한 진지한 고민만이 법정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권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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