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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38>|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내가 서울에 올라오자 이우적이 나를 데려간 곳은 세종로근처에 있는 서울청년회계열의 이정윤의 아지트였다.
당시 각 파벌의 아지트 가운데 가장 강력했던 곳은 명륜동 김해균의 집에 자리잡은 박헌영의 아지트였고 그 다음이 이정윤의 아지트였다.
나도 진주에 있는 팔월회의 동지들을 데려오면 서울에 독립아지트 하나쯤 만들 수 있는 실력이 있었지만 경찰에 체포된 경험이 전혀 없는 신인으로 무명이었기 때문에 15년 내지 20년 선배인 그들과 대등하게 행세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정윤의 아지트에 출입은 하게 됐지만 이정윤의 파벌에 참가할 의사는 없었다.
내가 당초 서울에 올라온 것은 특정한 공산주의의 파벌에 휩쓸리기보다는 나름대로 당시의 정세를 파악하고 여운형· 현상윤 선생 등을 만나 나의 진로를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어느 날 나는 가회동 꼭대기에 있는 현상윤 선생을 찾아갔다. 현 교장은 나를 반가이 맞으며 인촌 (김성수) 얘기를 하더니 『인촌이 새 인재를 구하고 있으니 지금 당장 함께 가자』 고 채근했다.
그러나 나는 인촌을 찾아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만난 일이 없는 인촌을 찾아갈 것 같았으면 잘 아는 여운형을 벌써 찾았을 것이다.
몽양은 해방되자마자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당시 내가 듣기로는 항복이 임박하자 조선총독부는 치안 권 이양을 처음에는 인촌과 고하 (송진우) 에게 부탁했으나 거절당하자 몽양에게 치안권을 넘겼고 결국 몽양이 독단적으로 해방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건준을 세운 것으로 듣고있었다.
이 때문에 인촌과 고하는 몽양을 공격하는 등 분열 상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사실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지 못하고 해방시 초부터 분열 상을 보이고 있는 인촌이나 몽양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
또한 해방 다음날 발 빠르게 조선공산당을 조직해버린 최익한· 하필원· 박낙종 등 장안파들의 성급함도 못마땅했다.
서로가 해방정국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날뛰는데 혐오감과 함께 허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정계진출을 단념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마음먹기까지 했다.
한데 8월18일 서울에 도착한 박헌영은 명륜동 김해균의 집을 아지트로 삼고 옛 동지들과 접촉을 갖기 시작했다.
김해균은 전북의 대지주의 아들로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졸업, 정태식과는 대학 동기생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김해균은 보성전문의 영문학교수로 있었는데 박헌영을 알게되자 그의 전 재산을 투입해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에 봉사했다.
박헌영은 김해균의 한옥 대저택에서 청년공산주의자들의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조직들과 활발한 접촉을 벌였다.
박헌영의 당면과제는 어떻게 하면 몽양이 만든 건준의 주도권을 잡느냐는 문제와 장안파 공산당을 말살하고 자신의 헤게모니아래 조선공산당을 재건해 정통성을 쟁취하느냐 였다.
일제의 혹독한 탄압아래서도 지하운동을 계속하며 공산주의의 정통성을 지켜왔다고 자부하는 박헌영으로서는 장안파들을 기회주의 집단으로밖에 볼 수 없었다.
당시 장안파들이 해방 하루만에 정당의 이름을 갖고 불쑥 뛰어나오기는 했으나 그 주동인물은 사상전향을 하거나 공산주의운동을 포기한 사람들이었다.
이 때문에 박헌영은 해방되기까지도 그들을 「유휴분자집단」 또는 「변절자 집단」으로 낙인찍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박헌영은 김해균의 집 안방에서 나중에 장안파 공산당의 결성소식을 전해듣고는 핏대를 올리며 화를 냈다고 한다.
아무튼 박헌영의 목전의 투쟁목표는 장안파 공산당의 와해였다.
여기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박헌영의 성장내력을 간단히 소개하겠다.
박은 1900년5월1일 충남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333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미곡상이었고 어머니는 첩으로 들어온 여자로 신양리 장터에서 여관업을 곁들여 술장사를 했다. 말하자면 박은 서자로 태어난 셈이다.
박은 대흥 보통학교를 거쳐 경성고보를 졸업한 후 미국에 건너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으나 사정으로 도미를 단념하고 서울에 머물러 있는 동안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게 됐다.
2O세 때 상해로 간 박은 재노 조선인 공산주의자 안병찬과 김만겸이 상해에 조직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해지부에 입당했다.
박은 1921년 가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 인민대표자 대회에 고려 공산청년동맹 대표로 참가하는 등 국외에서 활동하다 국내에 잠입,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기자를 지냈고 1925년4월 조직된 조선공산당 창당 멤버로 제 1차 고려 공산청년회를 결성했다.
공청이 결성된 후 1925년11월 소위 신의주사건으로 부인 주세죽 등 65명과 함께 경찰에 체포됐다.
박은 이 사건으로 재판을 받던 중 자기 똥을 자기가 먹는 등 거짓 미치광이 행세를 해 병 보석으로 석방된 후 1927년 부인과 함께 모스크바로 탈출했다.
박은 1933년 상해에서 일본경찰에 다시 체포, 국내로 압송돼 6년 동안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한 후 1939년 경성 콤그룹 사건으로 다시 쫓기는 몸이 되자 지하로 잠적, 해방 때까지 광주 벽돌공장에서 숨어 지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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