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담사와 여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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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최근 백담사와 그 주변에 갑작스런 시선의 집중 현상이 일어나고 정국에도 뭔가 파문이 일 조짐이 보이고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백담사 은거 1주년과 장세동 전 안기부장의 출감을 계기로 조성되고 있는 이런 분위기가 가뜩이나 지지부진한 정치권의 5공 청산작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을 갖고 지켜보지 않을 수 없다.
전 전 대통령과 장씨의 최근 언동을 보는 국민의 시각은 상당히 엇갈리고 있지만 우리는 자기들을 위해서나 정국을 생각해서나 계속 자중하고 겸허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백담사 은둔이란 형벌 아닌 형벌을 1년간이나 받고 있는 전 전 대통령에 대해 다수 국민이 동정을 하고 정치권의 빠른 청산 완결로 이런 비정상적 상태가 빨리 끝나기를 바라온 게 사실이다. 그리고 그가 어떤 형태로든 국회증언을 하겠다고 한데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보고 정치권이 그의 그런 소망을 빨리 실현시켜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은둔 1주년의 행사와 그의 일련의 발언을 계기로 그에 대한여론은 동정과 거부감이 엇갈리는 새로운 양상을 보이고 있다. 『여전히 뻣뻣하다』『전과 뭣이 달라졌느냐』는 등의 그 행사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지적이 나오고, 5공 인물들의 최근 분주해지고 있는 듯한 발걸음과 함께 정계의 세력판도에 변화가 오는 것이 아니냐는 성급한 관측도 나오는 판이다.
우리는 전 전 대통령과 그 측근들이 이런 여론의 흐름에 보다 민감해야 한다고 보며, 5공을 둘러싼 이 고통스런 현실을 빨리 청산하기 위해서라도 1년 전 참담한 표정으로 참회와 사죄의 성명을 발표하던 자세를 잊지 말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이제와 재임중의 공과 논을 새삼 들먹이고 몇 사람은 꼭 손을 보겠다고 생각했었다는 등의 불필요한 발언은 나오지 않았어야 했다.
우리는 백담사 문제와 관련해 여권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1년 전 그의 사과와 재산헌납·은둔을 받아내면서 여권은 그의 백담사 생활을 1년이나 방치할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권은 이런 기괴한 현대판 유배를 빨리 끝낼 성의있는 노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1년을 넘어선 이 시점까지도 확실한 전망조차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눈길을 끄는 전씨의 발언은 대부분 여권에 대한 강한 불만의 표시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인간적으로도 전씨가 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음이 분명하다. 전씨 측이 연내 5공 청산이 안되면 내년 1월쯤 독자적으로 증언을 하겠다고 하는 것이나 거처도 서울부근으로 옮기겠다고 흘리는 것도 모두 여권이 들으라고 하는 얘기로 보인다.
우리는 여권에 대한 전씨 측의 이런 불만이 압력으로 작용해 여권의 빠른 항보를 가져오기를 바라는 한편으로 정치권이 추진하고 있는 5공 청산작업이 이 때문에 뒤죽박죽 돼 버릴가능성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여권은 이제 더 이상 머뭇거리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야당의 5공 청산방안을 수용 하든가, 다른 과감한 카드를 내놔야 한다. 세간에는 결단력 없는 여권을 빈정거리면서 차라리 5공 때가 나았다는 역설적·냉소적 개탄이 나오고 있음을 여권은 알아야 한다.
우리는 현재 정국이 중대한 기로에 섰다고 본다. 여·야·백담사 할 것 없이 모두 자기들이 어떤 자세로 나가야 할지는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불필요한 잡음도, 더 이상의 우유부단도, 당략의 계산도 이제는 받아줄 여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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