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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은 버림받는 게 두렵다"던 아프간 대통령, 국민 버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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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의 아슈라프 가니 아프간 대통령. 이슬람력 새해 축하 행사에서 박수를 치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 3월의 아슈라프 가니 아프간 대통령. 이슬람력 새해 축하 행사에서 박수를 치고 있다. AP=연합뉴스

“도망자 대통령을 위해 일했다니 부끄럽다. 알라신께서 배신자를 응징하시길!”  

주(駐)인도 아프가니스탄 대사관이 공식 트위터 계정에 16일 올렸다가 삭제한 영문 트윗이다. 자국 대통령인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을 “나라를 다 쑥대밭으로 망쳐놓고 사기꾼 부하들과 함께 도망쳤다”고 격하게 비난하며 “이런 자를 위해 일하다니 수치심에 떨고 있다”고 덧붙였다. 가니 대통령은 이슬람 강경 수니파 무장단체인 탈레반이 수도 카불로 진격해오자 15일(현지시간) 나라를 버리고 이웃 국가로 도피했다.

나라를 지키는 대신 앞장서서 나라를 버렸다는 비난이 아프간 안팎에서 그를 향해 쏟아지고 있다. 이번 대사관 트윗도 그 일환으로 읽힌다. 위키피디아 등은 그를 이미 ‘전(前) 대통령’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인도 온라인 매체인 인사이더(Insider)는 “트윗 관련 질의를 아프간 대사관에 보냈으나 답변을 받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부연도, 부인도 하지 않은 것이다.

아프간 여성들이 지난 4월 국제사회가 보내온 구호품을 받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탈레반이 아프간을 다시 손에 넣으면서 이들은 글을 읽고 쓸 권리조차 또다시 박탈당하게 됐다. 로이터=연합뉴스

아프간 여성들이 지난 4월 국제사회가 보내온 구호품을 받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탈레반이 아프간을 다시 손에 넣으면서 이들은 글을 읽고 쓸 권리조차 또다시 박탈당하게 됐다. 로이터=연합뉴스

1949년생으로 만 72세인 가니는 학자 출신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2001년 9ㆍ11 테러를 당한 미국이 아프간 전쟁으로 탈레반을 몰아낸 뒤인 2002년 귀국한 뒤 대통령을 꿈꿨다. 그는 지난 6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만나 환담하며 탈레반에 맞서 아프간 재건을 계속할 의지를 밝힌 바 있다. 바이든 대통령 역시 회담 후 “아프간 여성과 아이들을 계속 돕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두 달이 채 안 된 지난 15일, 탈레반은 카불에 진군했으며, 가니 대통령은 카불을 떠났다. 탈레반은 여성의 교육권 및 사회 진출권을 무시하며 남녀차별을 당연시 한다. 벌써부터 카불 시내 곳곳에 여성을 모델로 내세운 광고판 등을 지우는 사진이 트윗을 통해 확산하고 있다. 카불 대통령궁엔 탈레반의 깃발이 게양됐다.

가니 대통령이 15일(현지시간) 망명한 뒤 버려진 대통령궁을 점령한 탈레반. AP=연합뉴스

가니 대통령이 15일(현지시간) 망명한 뒤 버려진 대통령궁을 점령한 탈레반. AP=연합뉴스

가니 대통령은 10대 시절부터 유학을 꿈꿨다. 교육 시스템이 붕괴한 아프간 대신 레바논 수도 베어루트의 아메리칸대학에 진학해 문화인류학을 공부했다. 그러다 미국 컬럼비아대 유학 기회를 잡았고, 경제학을 공부했다. 그의 주요 연구 분야는 아프간과 같은 실패국가(failed state)의 재건 방법이었다. 미국은 북한ㆍ아프간과 같은 실패국가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왔고, 그는 곧 미국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했다. 존스홉킨스대와 같은 명문사학에서 연구를 했고 이어 세계은행(WB)에서 실패국가 재건을 전문으로 하는 학자가 됐다. 2013년엔 포린폴리시(FP)가 선정한 세계 100대 석학에까지 이름을 올렸다.

그가 귀국한 건 2002년이다. 카불대에서 교편을 잡고 총장 자리까지 올랐다. 아프간 학계의 희망으로 떠올랐지만, 그는 곧 정계 진출 야심을 드러낸다. 2009년 처음으로 대선에 출마한 그는 4위에 그쳤지만 하미드 카르자이 당시 대통령에게 재무장관 자리를 받는다. 이후 2014년 대선에선 2위를 했으나 결선 투표에서 뒤집기로 과반을 득표했다. 당시 대선은 혼전 양상이었기에 미국이 개입했다. 가니는 이후 2019년 재선에 성공했다.

지난 6월 백악관에서 환담하는 바이든(오른쪽)과 가니 대통령.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6월 백악관에서 환담하는 바이든(오른쪽)과 가니 대통령. 로이터=연합뉴스

가니는 학자로서의 자신의 ‘실패국가 재건’ 비전을 현실화하는 데 실패한 정치인으로 기록되게 됐다. 워싱턴포스트(WP)는 15일(현지시간) 그를 두고 “정치의 꿈을 꾼 테크노크라트였던 인물”이라며 “정치엔 맞지 않았다”고 혹평했다.

가니의 2005년 TED 강연 중 아래 내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프간은) 해낼 수 있다. 우리 국민이 우수하기 때문이다. 아프간 국민의 91%가 국제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세 곳 이상의 라디오 뉴스를 청취하며, 이는 미국ㆍ유럽보다 높은 수치다. 왜? 국제 정세가 아프간에겐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프간 국민의 가장 큰 두려움이 뭔지 아는가? 버려지는 것이다.”  

그런 그가 아프간 국민을 버렸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가니 대통령은 2005년 TED 강연에 나서 ″아프간 국민이 가장 두려운 건 버림 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TED 캡처]

가니 대통령은 2005년 TED 강연에 나서 ″아프간 국민이 가장 두려운 건 버림 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TED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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