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김정기의 소통카페

도쿄 올림픽 보이콧 했다면 놓쳤을 교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김정기 한양대 명예교수 커뮤니케이션학

김정기 한양대 명예교수 커뮤니케이션학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도쿄 올림픽이 끝났다. 코로나 팬데믹의 여파로 텅 빈 관중석은 안타까웠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 온 국가대표 선수들의 기량이 빈 것은 아니었다. ‘보다 빠르게, 보다 높게, 보다 강하게’라는 올림픽 표어처럼 혼신의 힘을 다하는 선수들을 보며 희비의 공감을 나누었다. 인류의 체전은 반칙 없고 공정한 세계, 흥분의 승패마저 태연하게 공존하는 아름다움을 지구촌에 일깨워 주었다.

8·15에 돌아본 폐쇄적 민족주의 #한국 젊은 선수들 자신감 돋보여 #새로운 세대·가치·문화 도래 입증

대한민국의 참가를 놓고 시비가 있었다. 우리의 국토, 독도를 올림픽 홈페이지에 일본 영토로 표시하는 작태가 직접 원인이었다. 내년 3월 대통령선거에 나서려는 여권 예비경선 후보자들이 도쿄 올림픽 보이콧을 주장한 것이다. 여론조사에서 1위를 유지하는 후보자와 총리 출신의 후보자들을 포함해서다.

한국과 일본 상호 간에는 혐오와 부정의식이 존재한다. 서로에게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의 불편한 존재다. 사회심리학자 페스팅거(Festinger)에 따르면 인간은 인지적으로 편안하고 균형적인 상태인 인지조화(cognitive balance)를 유지하려고 한다. 따라서 인간의 내적 상태, 인간과 인간, 인간과 현상(이슈)의 관계에서 조화를 깨뜨리는 상황이 발생하여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가 되면, 이 부조화를 없애고 편안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이 발표된 1957년 이후 수많은 후속 연구가 부조화를 해소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 논의와 활용에 기여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에게 일본과의 인지부조화 해소는 쉬운 일이 아니다.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에서 겪은 아픔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악랄한 일제 식민지 치하를 벗어나는 건 조국의 독립과 해방이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할양이면/나는 밤하늘을 나는 까마귀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두개골이 깨어져 산산조각 나도/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중략)’ (심훈의 ‘그 날이 오면’).

소통카페 8/16

소통카페 8/16

시인의 절규를 공유하는 우리 국민의 정서상 도쿄 올림픽 보이콧과 같은 날선 주장이 귀에 쏙 들어오는 것은 당위적이다. 일본 정부와 정치인들이 국내 정치용으로 우리의 심기를 긁는 도발적인 언사와 억지를 그치지 않는 것도 부조화를 부채질한다.

이제는 부조화에 대한 선동적 해결책에서 벗어날 때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이번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보여준 자신감과 자존감에서 배우면 된다. 결승전에서 9분 35초의 혈투 끝에 분패하고도 승자인 일본 선수의 손을 들어준 유도 조구함의 의연함, ‘코리아 파이팅’ 외침으로 도쿄를 뒤흔든 양궁 김제덕의 절실한 승부욕, ‘해보자, 후회하지 말고’라며 원 팀을 이룬 김연경의 긍정 리더십. 노메달의 아쉬움보다는 한국 신기록 수립에 즐거워하며 내일을 준비하는 힘을 얻었다는 높이뛰기 우상혁의 행복감, 3일은 먹고 3일은 잠을 자고 세계 대회를 준비하겠다는 체조 도마 신재환의 가식 없는 솔직함. 우리 젊은이들은 부조화가 숙명인 승패 못지않게 승리를 위한 과정에서 흘린 땀방울의 소중한 가치를 알려주었다. 새로운 세대·가치·문화의 등장이고 변화였다. 국민은 열광했다.

어제는 일본에 대한 부조화가 더욱 현저해 지는 광복절. 그러나 이제는 우리를 위해 그 부조화를 깰 때이다. 물과 기름 사이인 한·일 관계를 보이콧, 토착왜구, 죽창가 같은 폐쇄적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말로 막다른 골목으로 모는 것을 멈춰야 한다. ‘올림픽 보이콧’을 했다면 6개의 금메달 중에서 5개를 휩쓸고, 여자단체전에서 아홉 번을 연속해서 금메달을 쟁취하는 양궁 신화는 탄생할 수 없었다. 학연과 지연, 과거와 권위, 이기와 독식, 내 편과 네 편이 아니라 오로지 ‘실력’만이 국가대표가 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온 양궁에서 배우면 된다. 우리 선수들이 보여준 자신과 노력에 대한 충족감과 자존감, 정정당당한 경쟁을 보장하는 공정 시스템에서 지혜를 얻어야 한다. 특히 여야를 막론하고 이미 진흙탕 싸움을 시작한 대통령선거 예비주자들이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