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 칼럼] 재신임後 무엇이 달라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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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온 국민이 정치 걱정을 하는 상황이 온 것 같다.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문제는 그러잖아도 혼란.갈등.표류를 거듭해온 이 나라를 더 큰 정치 난세(亂世)로 몰아갈 공산이 크다. 재신임을 묻겠다는 그의 발언은 이제 되돌릴 수도 없는 것 같다. 그런 결심을 한 盧대통령 머릿속에 과연 무엇이 있는지 정말 헤아리기 어렵다.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세간의 농담이 절로 떠오른다.

아마 상당 기간 국정공백이 불가피할 것이다. 또 한번 죽기살기의 정권대결이 벌어질 수도 있다. 북핵은 어떻게 하며, 이라크 파병은 하는 걸까, 안 하는 걸까. 재신임을 받기까진 대통령이 붕 뜨는 상황인데 어느 공직자가 책임질 일을 하려고 할까. 몇달 후 정권 향방도 모를 정치불안 속에서 어떤 기업이 투자나 새 사업을 계획하겠는가.

*** 국가적 혼란과 대통령의 '밑천'

盧대통령이 예상되는 이런 상황을 다 계산하고 결심했는지 의문이다. 큰 혼란과 국력의 소모, 국가적 기회 상실 등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재신임을 묻는 게 나라를 위해 더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것일까. 그는 "도덕적 신뢰만이 국정을 이끄는 밑천"이라고 했다. 그 밑천이 측근 비리 혐의로 손상됐기 때문에 재신임을 묻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를 최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대통령이 자기의 '밑천'을 확보하자고 온 나라를 들었다 놨다 해도 괜찮은가. 예상되는 국가적 혼란과 국민불안에 비하면 자기의 '밑천'은 작은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문제의 크기를 잘못 판단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재신임과 같은 극단 조치가 아니라도 '밑천'을 만회할 방법은 많이 있지 않을까. 위헌 논란은 어찌 할 것인가.

부패한 측근은 언제나 있을 수 있다. 측근 비리가 나올 때마다 대통령이 재신임을 받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측근 비리는 국민에게 사과하고 깨끗한 사람으로 보좌진을 새로 짜면 된다. 국민이 요구하는 것도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盧대통령은 측근 비리에 왜 이런 과잉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최도술 비리 혐의의 내용이 뭐기에 대통령이 이렇게 나올까. 비리 의혹은 수사로 규명해야지, 재신임을 받는다고 덮여질 일이 아니다. 盧대통령의 재신임 발언으로 최도술 사건은 국민이 더 주목하게 되고 검찰의 더 엄정한 수사가 불가피하게 됐다.

盧대통령은 '그동안 축적된 국민의 불신'에 대한 책임도 재신임을 묻는 이유에 포함시켰다. 그에 대한 '그동안의 불신'은 널리 알려진 대로 잦은 말실수, 패거리 인사, 정책 혼선, 비전 부재(不在) 등에서 빚어진 것이다. 그런 문제점을 그대로 안고 가는 이상 재신임을 받아도 국정은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재신임 국민투표라는 극단적 처방까지 내놓으면서도 자기를 불신에 빠뜨린 문제점을 고치겠다는 말은 없다. 어제 국회연설에서 재신임을 받으면 내각과 비서실을 개편하고 국정을 쇄신한다고 했지만 그런 의지가 있다면 그때까지 미룰 필요가 있을까.

지금이라도 정말 쇄신을 한다면 국민투표를 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그의 '밑천'도 쉽게 만회될 것이다. 그러나 이젠 국민투표를 하는 수밖에 없게 된 것 같다. 다만 혼란과 손실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국민투표를 국가의 좋은 기회로 활용할 궁리를 하는 일만 남은 것 같다.

*** 4년 더 맡기느냐 마느냐의 선택

우선 盧대통령은 재신임을 받을 경우 내각과 비서실의 개편은 물론 지난 8개월간 드러난 자기 자신의 여러 문제점을 시정하겠다는 공약을 하는 게 좋겠다. 얼굴만 다르고 코드가 같은 사람끼리 이런저런 자리를 차지하는 개편만으로는 국정쇄신이 되기 어렵다. 무엇보다 대통령 자신이 달라져야 쇄신이 가능하다. 재신임의 혼란과 불안을 치르는 국민으로서 국정쇄신과 대통령의 새 모습을 요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국민투표가 실시되면 단순히 盧대통령에 대한 도덕성 평가나 측근비리에 대한 면죄부를 주느냐 마느냐의 자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국민 입장에선 지난 8개월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가 대통령감이냐 아니냐, 4년을 더 맡겨도 좋겠는가 아닌가 하는 기준에서 판단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국민투표는 '盧대통령을 더 좋은 대통령으로 만드는 계기' 또는 '盧대통령보다 나은 대통령을 뽑는 기회 확보'의 두가지 중 하나가 돼야 할 것이다.

송진혁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