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병목현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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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요즘 정치 판의 돌아가는 모양이 어쩐지 불안하고 정상적이지 못한 것 같아 걱정스럽다.최대 현안인 5공 청산에 대해서는 민정당이 모처럼 작심을 하고 정호용 의원을 밀어붙이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지만 대통령이 있을 때도 잘 안되던 일을 굳이 대통령 부재중에 해치운다는 발상도 뭔가 석연치 않다.
그런가 하면 야당들은 지금 정기국회가 바빠도 한참 바빠야 할 시기에 국회 아닌 지구당 대회 등의 외곽행사에 열중하면서 당총재들이 때아니게 지방을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5공 청산의 막후협상을 한다면서 여야간부들이 주말이고 주중 이고를 가리지 않고 골프장을 왔다갔다하는 현상도 부쩍 자주 눈에 띄고 있다.
협상의 분위기 조성을 위해 필요하다면 골프도 쳐야겠지만 골프장에 가야 꼭 대화가 될까 하고 생각할 국민도 다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정치권의 이런 모습에서 또 한번 시기를 놓치고 엄청나게 쌓여있는 중요 현안들의 상당부분이 이번 국회에서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금하기 어렵다. 벌써 정기국회의 1백일 회기도 70여 일이 흘러가 남은 기간은 한 달도 채 못된다. 이 동안에 5공 청산작업의 완결뿐 아니라 예산안, 악법개폐, 토지공개념의 입법작업, 지방자치관계법, 경찰중립화 법안 등등 이루 다 열거하기 어려운 많은 중요 의안들을 처리해야 한다.
과연 이 국회가 이기간에 이런 일들을 다 해낼 수 있을 것인가. 가령 추경예산안 같은 것은 대부분 연내집행이 돼야 할 사항인데도 여지껏 처리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5공 청산만이 정치의 전부인양 입법작업에도, 예산심의에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채 건성으로 협상으로만 돌고 있다는 인상이다. 물론 5공 청산이 가장 우선적인 할 일이란 점도 이해하지만 5공 청산으로 정치가 병목현상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본다.
전에도 누차 강조했지만 정치권은 좀더 일에 열성을 갖고 서둘러야 한다. 엄청나게 쌓여만 온 그 많은 일들을 언제 다 처리할 작정인가.
5공 청산을 위한 협상은 협상대로 하고 예산심의와 각종 입법 작업도 성의를 갖고 빠른 속도로 촉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보안법·안기부 법 등의 개정을 두고는 야당끼리도 의견이 갈리는 모양인데 일단 큰 테두리의 공감대 위에서 개정하고 미진한 부분은 다음에 다시 의견을 모아 2차 개정을 추진하는 방식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내년·상반기 지방의회구성을 합의 공표하고도 정치권이 지방자치 관계법 심의에는 성의가 없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기존 정치권은 지자제실시를 내심 싫어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만일 지자제 법을 입법하지 못함으로써 지방의회 구성이 늦어지거나 공중에 붕 뜨게 된다면 정치권은 그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가.
토지 공개념 입법도 마찬가지다. 이 중요한 문제를 정당들이 말로만 떠들어놓고 실제 국회에서의 심의나 처리에는 늑장을 부리고 소홀히 한다면 국민들이 어떻게 볼 것인가.
지자제 법이나 공 개념 관계법만 하더라도 벌써 충분히 심의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게 됐다. 정치권이 요즘 보이고 있는 이런 더딘 행보로는 모르긴 몰라도 많은 중요의안들을 그냥 넘기거나 졸속처리하기 십상이란 생각이 든다.
정치권은 여야 할 것 없이 최근 정치 판을 국민들이 어떤 눈으로 보고있는지를 의식해 협상과 의안처리에 좀더 진지성과 열성을 보일 필요가 절실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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