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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달의 예술

경험하지 않은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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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주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이주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올해는 군부독재 시기 국가폭력의 상징이자, ‘이적표현’이란 명목으로 예술품을 압수하고 예술가를 탄압했던 중앙정보부 창설 60년이 되는 해다. 평화박물관(스페이스99)의 기획전 ‘무색사회; 중앙정보부 60’은 30대, 40대 작가 위주로 8인을 선정하여, 민주화 이후 세대가 경험하지 않은 역사를 기억하고 소환하는 방식을 영상과 설치, 만화와 사진을 통해 보여준다(8월 11일까지).

작가들은 추체험의 연결 고리로 남영동 대공분실에 주목한다. 1989년생 주용성은 이 공간에서 ‘공포를 느꼈다기보다 오히려 무감각했다’고 토로하면서 고문 수사를 위해 치밀하게 설계된 건물의 구조를 사진으로 기록한다. 연행된 자가 방향 감각을 잃도록 고안된 1층부터 5층까지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 붉은색 타일로 치장된 물고문실, 빛을 극도로 제한한 좁은 창과 방음벽 등, 공간에 배인 공포와 차가움은 작가의 절제된 시선을 뚫고 나와 보는 이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정명우, 벽치기, 싱글 채널 비디오, 15분, 2019. [사진 평화박물관]

정명우, 벽치기, 싱글 채널 비디오, 15분, 2019. [사진 평화박물관]

정명우의 ‘벽치기’는, 대공분실 마당에 생뚱맞게 설치돼 있던 테니스 코트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영상 속 작가는 벽을 향해 끊임없이 테니스공을 날린다(사진). 벽에는 중첩된 이미지들-테니스를 치는 일제 시기 일본군인, 테니스를 즐기는 우리나라 장성들과 역대 대통령들-이 투영되고 이어 국가폭력에 희생된 민주인사들의 모습이 교직된다. 작가는 내레이션을 통해 벽에 공을 치는 행위는 ‘아픈 과거가 행여 현재가 되어 되살아날 때 맞서 싸우기 위한 훈련’임을 알린다.

송상희의 영상 ‘그날 새벽 안양,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은 극락을 의미하는 불교 용어 안양(安養)과 동명의 도시 안양을 유토피아의 장소로 가정하고, 이곳의 우체국·경찰서·운동장 등 공공기관 33곳의 새벽 모습을 CCTV의 시점에서 기록한다. 평온을 가장한 도시가 결국 안전과 편리를 약속한 기관들에 의해 지배당한 기만의 장소였음을 드러내고자, 작가는 SF 소설에서 발췌한 자막으로 비관적 현실 인식을 전한다. 고문실처럼 어두운 아트홀 무대를 비추며 ‘권력은 고통과 모욕 가운데 존재하는 걸세’(『1984』, 조지 오웰)라는 자막을, 텅 빈 병원을 비추며 ‘처음 몇 시간 만에 숨을 거둔 수억 명의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할 것이다’(『스완 송』,로버트 매캐먼)라는 종말론적 메시지를 전함으로써 디스토피아는 소설 속이 아닌 ‘지금, 여기’임을 강조한다.

대공분실이 민주인권기념관이 된 오늘, 상처를 복원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경험하지 않은 고통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죽은 과거는 언제든 현재가 될 수(정명우)’ 있기 때문이다. 전시는 젊은 작가들이 어떻게 민주화의 기억을 선별해 냄으로써 박제화되려는 역사에 숨결을 불어넣는지를 보여준 좋은 예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