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설득해 ‘미수금’만 겨우…이란 제재에 울고웃는 韓기업들

중앙일보

입력 2021.07.16 06:00

업데이트 2021.07.16 08:54

한국 기업들이 최근 이란에 대한 미국의 경제·금융 제재로 미처 받지 못한 수출대금 약 7000만 달러(805억원)를 회수했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지난 3월 이란 측에서 한국 수출기업에 지불해야 할 대금을 제재 예외 대상으로 인정해준 데 따른 결과였다.

2018년 트럼프 이란핵합의 탈퇴
제재 대거 복원...한국도 공조
삼성, LG 빠진 시장 中 기업 진출
이란 정부 "배신감" 공개 토로
이란 시장 재진출시 난항 예상

기업들은 짧게는 2년, 길게는 3년여 만에 미수금을 회수할 수 있었지만 '제재 리스크' 때문에 여전히 답답한 상황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약속한 이란 핵 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 복원 협상은 팽팽한 평행선이고, 이란에 대한 제재 해제가 언제 어떤 식으로 이뤄질지 가늠하기도 어렵다.

LG·삼성, '기회의 땅' 이란 떠난 이유는  

2018년 5월 당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일방적으로 이란 핵 합의(JCPOA)를 탈퇴한다는 내용의 문서에 서명한 이후 이를 공개했다. [로이터=연합뉴스]

2018년 5월 당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일방적으로 이란 핵 합의(JCPOA)를 탈퇴한다는 내용의 문서에 서명한 이후 이를 공개했다. [로이터=연합뉴스]

2015년 7월 핵 합의 타결로 뒤늦게 열린 이란 시장은 ‘기회의 땅’으로까지 불렸고, 한국 기업들도 대거 진출했다. 2016년 5월엔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이란을 방문해 ‘세일즈 외교’까지 펼치며 정부 차원에서 한국 기업의 이란 시장 진출을 지원·독려했다. 덕분에 자동차·철강·가전제품 분야의 경우 2010년 이후 사업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졌고, 특히 가전제품의 경우 삼성전자·LG전자가 시장의 70%를 차지할 정도로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하지만 3년 전부터 이란 거리에 삼성전자·LG전자 등 한국 기업들의 광고판이 철거되기 시작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2018년 5월 일방적으로 이란 핵 합의를 탈퇴하고, 이란에 대한 제재 체제를 사실상 복원하면서다.   

2019년 4월부터는 이란과의 교역에서 원화결제마저 금지되며 한국 기업의 활동은 사실상 전면 중단됐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코트라)의 ‘2020년 해외출장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대이란 수출 규모는 2018년 약 22억만 달러에서 2019년 약 2억만 달러로 87% 급감했다. 

줄어든 대 이란 수출입.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줄어든 대 이란 수출입.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해당 보고서에는 “2019년에는 (한국 기업) 신규 투자신고가 없는데, 이는 미국의 이란 제재가 부활해 투자자금 송금 방안이 없기 때문”이라는 내용도 담겼다.

미국발 제재에 정부 압박까지 

2016년 5월 이란을 방문한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현지 아자디호텔에서 동포 대표단과 간담회를 갖는 모습. [청와대사진기자단]

2016년 5월 이란을 방문한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현지 아자디호텔에서 동포 대표단과 간담회를 갖는 모습. [청와대사진기자단]

업계에서는 제재 자체보다 정부의 정무적 판단이 대이란 기업 투자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2015년 핵합의 타결 이전에는 미국뿐 아니라 유럽연합(EU)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등 다층적 제재가 유지되는 상황이었지만, 이란 시장에 대한 한국 기업들의 관심과 진출 의지는 어느 때보다 높았다는 것이다. 정부 역시 이란 시장의 잠재력을 주목하는 분위기였다는 게 업계 소식통들의 전언이다.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대이란 제재에서 미국과 철저히 보조를 맞추는 '제재 모범생'을 자처했다는 분석이다. 이유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가동을 위해 트럼프 행정부의 협력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2018년 제재 복원 당시 한국 기업이 유독 발 빠르게 사업 규모를 축소하거나 이란 시장에서 철수한 것 역시 정부가 이를 위해 기업을 압박한 결과로 보는 시각도 있다.

2019년 초까지 이란에서 화장품 회사의 주재원으로 일했던 신모(51)씨는 “2018년 이란 제재가 복원됐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제재를 어기지 않으면서 얼마든지 기존 사업을 이어나갈 수 있는 방법이 많았고, 실제로 2015년 전까지 한국 기업들은 제재가 유지되는 상황에서도 이란에서 사업 규모를 키워왔다”며 “하지만 정부 차원에서 ‘제재 순응’이라는 가이드라인을 세워 협조해달라는 뜻을 전해왔고, 제재 리스크에 정부의 감시 리스크까지 더해지며 사업을 포기한 기업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배신감 느낀 이란, '한국 기업 때리기' 

이란 외무부 대변인이 지난해 2월 "한국 기업이 다시 이란에 진입하긴 매우 어려울 것"이라며 트위터에 게재한 사진. 삼성전자의 광고 현수막이 철거되는 모습이 담겼다. [트위터 캡쳐]

이란 외무부 대변인이 지난해 2월 "한국 기업이 다시 이란에 진입하긴 매우 어려울 것"이라며 트위터에 게재한 사진. 삼성전자의 광고 현수막이 철거되는 모습이 담겼다. [트위터 캡쳐]

제재 측면에서 한국이 미국 편에 서자 이란 측은 즉각 ‘한국 기업 때리기’에 나섰다. 지난해 2월 세예드 무사비 이란 외무부 대변인이 트위터에 삼성전자의 현지 매장이 철거하는 사진을 올리며 “미국의 제재에 가담해 이란을 떠난 나라의 기업이 다시 이란에 진입하긴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게시글을 올린 것이 대표적 사례다. 제재가 해제된 이후 한국 기업이 다시 이란 시장에 진출하려 해도 이란 정부 차원에서 불이익을 주겠다는 사실상의 경고 메시지였다.

이란 가전협회는 지난해 2월 15일 현지 언론 기고글을 통해 “미국의 제재에 순응한 두 한국회사(삼성전자·LG전자)는 부품 공급을 중단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이란 협력사를 제재한 것”이라며 “어려운 시기에 이란 소비자를 놔둔 채 떠난 기업”이라고 비판했다.

이와 관련 코트라 관계자는 “이란에선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말이 일상적으로 쓰일 만큼 의리를 중요하게 여기는데, 미국 제재에 따른 한국 기업의 철수를 일종의 배신으로 느끼는 분위기가 강했다”고 말했다.

한국 기업 대체한 中 화웨이·하이얼 

2018년 이란 제재가 부활하기 전까지만 해도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이란 시장 점유율은 60%에 육박했다. 사진은 이란 소비자들이 2017년 LG전자의 현지 가전제품 행사에 참석한 모습. [사진 LG전자]

2018년 이란 제재가 부활하기 전까지만 해도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이란 시장 점유율은 60%에 육박했다. 사진은 이란 소비자들이 2017년 LG전자의 현지 가전제품 행사에 참석한 모습. [사진 LG전자]

한국 기업의 철수로 어부지리를 누린 건 중국 기업들이었다. 이란 정부의 배신감보다도 이미 한국 기업이 떠난 자리를 중국 기업이 메우고 있다는 게 이란 시장 재진출의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특히 중국의 화웨이·하이얼 등은 이미 이란에 기술을 전수하며 이란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외교 소식통은 "70%에 이르던 삼성과 LG의 시장 점유율을 이미 하이얼이 다 잠식했다고 볼 수 있다"고 귀띔했다.

이와 관련 코트라는 이란 경제 상황 분석 보고서를 통해 “중국은 가장 적극적인 이란 투자국으로 제재 기간 중 서방 기업의 빈 자리를 획득했다”며 “특히 중국은 상임이사국 지위를 십분 활용해 유엔 안보리 내에서 이란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제재를 잘 지킨 한국은 불이익을 받고, 이를 사실상 무시한 중국이 우월한 위치를 점하게 된 모순된 상황이다.

실제 중국은 이란을 일대일로 사업의 핵심 파트너로 인식하며 지난 3월엔 정치·경제·무역분야 협력을 약속하는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협정’을 약속하며 이란 공략에 나섰다.

김혁 한국외대 페르시아어·이란학과 겸임 교수는 “한국 기업들이 이란에서의 사업 규모를 대폭 축소하며 중국 기업의 제품과 이란 현지 제품이 그 빈자리를 대부분 메웠다”며 “이란 제재가 해제된다 해도 한국 기업 뿐 아니라 전세계 각 기업의 이란 진출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며 경쟁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이란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다각도의 긍정적인 시그널을 보여주는 노력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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