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20kg, D데이 월요일 정오"…美의원 55명 야반도주 전말

중앙일보

입력 2021.07.15 14:03

업데이트 2021.07.27 00:39

미국 텍사스주 의원들이 지난 13일 워싱턴 연방 의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미국 텍사스주 의원들이 지난 13일 워싱턴 연방 의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미국에서 주(州) 선거법 개정안을 둘러싼 힘겨루기가 반대파 의원들의 집단 '야반도주' 사태로 번졌다.

민주 "공화 주도 선거법 악법" 저지 위해
정족수 미달 노려 워싱턴으로 몰래 탈출
주 정부 "텍사스 귀환 시 체포하겠다"
양당, 우편투표 제한 등 투표권 놓고 갈등

텍사스주에서 공화당이 주도하는 선거법 개정안 통과를 막기 위해 민주당 의원 55명이 수도 워싱턴으로 향한 건 지난 12일(현지시간). 이들은 주 상원과 하원을 모두 장악한 공화당 측 개정안을 의결 정족수 미달로 저지하기 위해 '몰래 탈출'을 택했다.

민주당은 우편투표 및 부재자 투표 조건을 강화하고, 24시간 및 드라이브스루 투표를 금지하는 등 투표권을 제한하는 선거법 개정안이 ‘악법’이라는 입장이다.

워싱턴 상경 사흘째인 14일 이들은 연방 의원들과 언론을 상대로 법안 저지 홍보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텍사스 주정부와 주의회는 이들이 텍사스주로 돌아오는 즉시 체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텍사스주에선 주법에 따라 주 정부와 의회가 공권력을 동원해 투표에 불참한 의원들을 찾아내 의회로 데려올 수 있다. 다만, 법집행 관할권이 텍사스주로 한정되기 때문에 다른 주로 나가면 손을 쓸 수가 없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의원들은 일요일인 지난 11일 밤늦게 사전 녹음한 행동 요령을 전화 메시지로 전달받았다. 음성 파일에는 짐은 45파운드(약 20㎏)를 넘지 않도록 꾸릴 것, 내일(월요일) 정오에 오스틴(텍사스 주도)을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할 것, 목적지는 그때 알려준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장기 부재에 대비해 생업을 마무리하고, 노부모 등 가족과 인사를 나누는 등 밤새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클로디아 올대즈 페레즈 하원의원은 세탁 후 건조하지 못해 축축한 옷을 잔뜩 싸 올 정도로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갔다.

미국 텍사스주 의원들을 태운 버스가 12일 이들이 빌린 전세기가 있는 오스틴 공항에 도착했다. [AP=연합뉴스]

미국 텍사스주 의원들을 태운 버스가 12일 이들이 빌린 전세기가 있는 오스틴 공항에 도착했다. [AP=연합뉴스]

30인승 전세기 두 대가 대기 중인 오스틴 공항으로 향하는 전세버스 안에서 행선지가 워싱턴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계획이 유출돼 일이 틀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한 의원은 "워싱턴과 뉴멕시코주, 루이지애나주 중 한 곳이라고만 알고 있었다"고 했다.

텍사스주 공권력이 닿지 않아 이들을 강제로 데려갈 수 없고, 투표권을 제한하는 선거법 개정 문제를 전국적으로 이슈화할 수 있어서 워싱턴이 낙점됐다. 연방 의회 차원에서 투표권 제약을 저지하라는 압력을 가하려는 취지도 있다.

백신 접종을 못 하는 17개월짜리 자녀를 동반한 존 부시 3세 하원의원은 비행기를 이용할 경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걸릴 것을 우려해 부인과 교대로 23시간을 운전해 워싱턴에 도착하기도 했다.

집으로 되돌아가면 체포될 운명에 놓인 민주당 의원들은 졸지에 '도망자' 신세가 됐다. 워싱턴 호텔에 짐을 푼 의원들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집으로 돌아갈지 기약할 수 없게 됐다.

공화당 소속인 그레그 애벗 텍사스 주지사는 이들이 돌아올 때까지 투표법 통과를 위한 특별 회기를 계속 소집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이 텍사스주에 발을 들이는 순간 체포할 것이라는 엄포도 덧붙였다. 의회는 법집행기관이 이들을 체포할 수 있도록 사전 승인했다.

미국은 텍사스주뿐만 아니라 공화당이 우세한 '적색 주(Red State)' 대부분이 투표법 개정을 놓고 진통을 겪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난해 대선 패배 후 투표 규칙과 절차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적색 주들이 일제히 투표법 개정에 착수했다. 시민단체 조사에 따르면 6월 21일 현재 조지아, 아칸소 등 17개 주에서 23개 선거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민주당은 공화당이 주도하는 투표법은 투표 절차와 방법을 까다롭게 만들어 이민자와 노동자, 유색 인종 등 민주당 지지 성향 유권자의 투표 참여를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공화당은 투표 절차를 좀 더 투명하게 바꾸자는 것이지, 특정 인구나 계층의 투표를 제한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텍사스주 공화당은 드라이브 스루 투표와 24시간 투표를 금지하고, 우편 투표 조건을 강화하는 내용의 법안을 제안했다.

주 상원은 지난 13일 18대 4로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민주당 의원들이 대거 워싱턴으로 간 하원 표결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전체 하원의원 150명 가운데 3분의2(100명)가 참석해야 하는데, 잔류한 민주당 의원을 포함해 80명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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